<이 동숙 수기>

1999년 6월16일, 나는 잘살아 보려는 마음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고국을 찾아왔다.

  입국 3일 만에 나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월 60만원 받고 다리뼈가 골절되어 운신 못하시는 89세 할머니의 간병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사십이 다 됐건만 왼쪽 인공 눈이 뿌옇고 백발이 된 할머니가 정말 무서웠다. 할머니 곁에 누운 나는 짧아 3년, 길어 5년을 계획하고 왔는데 이렇게 5년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었다. 상한 다리로 인해 잠들어 한 시간을 못 넘기시고 낮과 밤이 따로 없는 할머니를 간호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첫 일자리인 만큼 노인을 잘 보살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와중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나는 두 번이나 졸도 했지만 할머니의 부름 소리만 들리면 자다가도 발딱 일어났다. 소화 안 된다고 하시면 배를 어루만져 드렸고 움직이고 싶다고 하시면 앉혔다 눕혔다 해 드리면서,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 드렸었다.

아들만 넷인 할머니께서는 "네가 내 양딸이 돼 줄래?"하시면서 나중에 나를 천국으로 데려 가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문득, 할머니가 내 친할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이 훈훈해 났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할머니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면 그 이상의 보답이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는 자부심이 생겼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서울대 교수아파트에서 8개월 된 어린애와 7살 된 두 남자 애의 가정 보모로 일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애에게 못하는 모정과 사랑을 이 두 아이들에게 다 바침으로써 아이들의 부모로 하여금 시름 놓고 출근 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는 그 아이들이 신경 안 써도 성실하게 자라면서 공부 잘하는 것을 볼 때면 막 시샘이 날 지경이라면서, 애의 어머니는 내가 일자리만 부탁하면 가까운 후배들에게 애를 잘 돌본다고 소개해 주군 하였다.

  얼마 후 나는 기독교사이트 믹스앤매취를 알게 되었다. 비록 서로 모르는 사이었지만 그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은 나에게 행복을 주었고 사랑은 또 나눔이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천국에 가신 할머니의 손이 무시로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설립했던 ‘한마음협회’와 까페 ‘재한동포회’가 중국 연변텔레비젼 프로그램 ‘사랑으로 가는 길’에 사랑의 성금을 보내는데 동참을 했고, 또 회원님들과 함께 구로구에 있는 장애인들이 전문 모여서 생활하는 ‘브니엘의 집’에 거의 1년간 매월 1차씩 자원 봉사를 다녀 왔었다. 장애인들과 함께 한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재한동포회’를 계기로 명칭이 바뀐 카페 ‘나무잎사랑’의 많은 회원님들과 함께 고향에 있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적으나마 장학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우리들이 보내주는 장학금으로 부담 없이 공부하고, 또 더욱 좋은 중점학교로 진학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 가슴은 뿌듯했고 삶이 더욱 보람 있게 느껴졌다. 

 2006년 봄의 어느 하루,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재미교포 유학생 강창훈씨의 자원봉사로 영어 수업을 받고 있던 우리 회원 3명은 수업 끝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전에 자원봉사를 다녀왔던 ‘브니엘의 집’을 한번 다녀오자고 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창훈씨가 자기에게 기타가 있으니 노래를 준비해서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훈씨가 배워준 영어 찬송가 한곡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준비하였다. 나는 비록 노래방에 가면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지만 용기를 내여 기꺼이 동참을 했다.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가지고 간 과일들을 나눠주고 기타 반주에 맞춰 찬송가에 이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다. 장애인들도 인차 함께 따라 불렀다. 그들이 어찌나 잘 불렀던지 나의 목소리는 그만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창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고 행복해진다. 더욱이 나이가 50좌우인 우리 ‘할머니’ 셋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게인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거의 1년을 주일마다 꼭꼭 찾아 준 강창훈씨를 보면서 나는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손발 운신 못하는 할머니나 걸음마도 타지 못하는 애들을 돌보면서 ‘가정부’가 천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가정부야말로 사랑과 나눔을 배워주는 직업이란 것을 깨달았다. 봉사하는 미덕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난 간 그 해였다. ‘자진출국, 재입국’이란 정책이 나오자 나는 하루 빨리 가족을 만나고 싶어 9월 23일자로 비행기 티켓을 샀었다. 그러나 24일에 나의 몸은 어느덧 ‘매미’의 피해를 입은 경남 마산지역 수해복구 지역에 자원봉사자로 나가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달래면서 9월 30일자로 티켓을 연장하고 수재민들의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현장에서 온몸이 진흙탕이 되어 쇠파이프를 나르고 비닐하우스를 정리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그러던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손에 따뜻한 커피 잔을 건네주면서 혀를 찼었다.

“에고, 이 몸 보래, 완전히 흙보살이구먼. 조선족이라면서 어떡해 우리 맘씨와 똑 같누? 마, 조선족도 우리와 한집안이지, 피도 같구, 얼굴 생긴 것두 같구…이렇게 봉사하면 죽어서도 천당 간다네. 호호.”

“천당에요? 네-…”

나는 내가 보살피던 할머니 생각을 했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어쩜 이 말을 들으려고 이렇게 왔는지 몰랐다. 스스로, 나눔과 봉사 속에 사랑의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던가 보다.

나는 정말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그렇게 한 평생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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