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소설가의 중국 동북지대 답사기>

연길행 표를 사기 위해 두 번의 지옥을 경험했다
힘든 시간 이겨내고 다가선 창구에선 입석표만 팔고
암표상과의 흥정 실패…길거리에 버려져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옛 이름이 봉천역인 중국 심양역은 우리네 명절날처럼 언제나 붐빈다.
중국 여행을 하다보면 황당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기차표를 사기 위해 당한 황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중국, 특히 만주 여행에서는 기차 없이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넓은 지역의 이동에는 기차만큼 편한 것이 없다. 이동 중에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 수 있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기차 여행이다.

그런데 중국 기차 여행에는 만만찮은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표를 구하는 것이다. 인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나라인지라 큰 역에는 평소라 해도 거의 예외 없이 우리의 명절처럼 사람들이 붐빈다. 우선 역사에 들어서는 순간 그 많은 사람에 기가 질려 버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방송(중국어 공부를 웬만큼 한다고 했는데도 그놈의 안내 방송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거기다가 엄청나게 많은 행선지에 다시 기가 질려 표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심양역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내가 처음 심양 역에서 연길행 기차표를 끊을 때도 그랬다. 가까스로 찾은 창구가 거의 역사 바깥까지 줄이 이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복잡한 틈에 낄 수밖에 없었다. 냉방 시설도 없는 더운 공간에서 혹시나 잃어버릴까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창구가 다가왔다.

"엔지(연길)"하면서 창구를 보니 좌석은 없고 입석표만 팔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입석표라도 구하기 위해 그렇듯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아, 그 황당함이란….

프로 야구 초창기에 야구장에 갔다가 경기가 끝나고 화장실 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 지른 긴 줄을 섰다. 마려운 소변을 애써 참고서 시간을 견뎌냈다. 아, 줄이 끝나는 곳에는 화장실이 아니라 그냥 벽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벽인 줄도 모르고 줄을 섰던 것이다. 그때보다도 더 황당했던 것은 밤이 새도록 가야하는 먼 거리를 침대칸이나 좌석 없이 여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허탈과 낭패감으로 일단 창구를 물러났다. 어디 가서 배낭을 풀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요량으로 역사를 나왔다. "엔지" 하면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자 사내는 손가락 다섯을 쫙 폈다. 50위안을 더 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50위안이 아니라 500위안이라도 주고 표를 사야할 처지였기에 암표꾼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암표꾼은 몹시 눈치를 살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서탑(조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가야 한다고 하니까 좋다고 했다. 그는 택시 안에서 표를 내밀며 돈을 요구했다. 연길까지 침대칸 요금이 130위안이라 50위안 덧붙여 180위안이었다. 너무 쉽게 흥정이 된다는 생각도 있고, 50위안이 조금 비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고, 중국에서는 무조건 깎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는 말로 40위안을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흥정을 시도했다. 그런데 암표꾼은 아무런 말도 없이 택시를 세우더니 차들이 많이 다니는 복잡한 길 한복판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내려버렸다. 아, 또다시 나는 그 황당함에 그저 멍할 따름이었다. 아니, 모든 거래에는 밀고당기는 것이 있는 법인데 어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내려버린다는 말인가. 나는 택시를 돌려 부랴부랴 역광장으로 다시 갔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속에서 그를 찾는다는 것은 솔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따라 바람까지 스산하게 불어서 심양역 광장이 그렇게 넓게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암표꾼을 만나 기차표 문제를 해결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택시에서 그냥 내려버린 그 암표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심양역 주변에는 암표상들이 많았다. 그러니 애초 그들을 찾았다면 기차표 구하느라 한 나절을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 놈의 50위안(7000원)이 문제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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