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문학특집

은희는 쏘파에 쪼그리고 앉아 융으로 된 쿠션술을 만지작거리며 맞은쪽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3단 서랍장 맨 우에는 조화가 꽂혀있는 꽃병이, 중간에는 학교 때 친구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은 곰돌이네 가족이 제각기 머플러나 모자를 눌러쓴채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맨 아래에는 지난해 로동절 휴가때 식물원에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을 넣은 액자들이 조르르 놓여있었다. 은희의 눈길은 줄곧 꽃병과 곰돌이와 액자 사이를 오가고있었다.

은희는 조심스레 다리를 펴보았다. 얼마동안을 쪼그리고 앉아있었는지 고압전류에 감전되기라도 한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다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은희는 이마살을 모으고 조심조심 다리를 주물렀다.

은희는 쏘파밑에서 실내 슬리퍼를 꺼내신고 뭔가 딱히 할일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방안을 서성거렸다. 방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있는 커튼때문에 어둑어둑했다. 은희는 커튼을 살짝 젖히고 창가에 서서 멀리 시선을 주었다. 낮게 드리운 희뿌연 먼지속으로 향산의 륜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희는 다시 커튼을 꽁꽁 여며놓고 돌아섰다. 털썩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다시 서랍장의 꽃병과 곰돌이와 액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머리속은 도적이 금방 헤집고 간 방안처럼 란장판이 되여 뭐가 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임신입니다. 의사는 고무장갑에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빼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은희는 한겨울에 랭수를 뒤집어쓴것처럼 온몸이 뻣뻣해났다. 피를 말리며 날자가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걱정하던 일이 끝내 발생했음을 느끼자 은희는 그만 울고싶었다.

의사가 내미는 병력카드를 빼앗다싶이 가로채고 은희는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종종걸음으로 뻐스정거장에 도착해 뻐스를 기다리면서도 은희는 의사의 추궁하는듯한 눈길이 뒤통수에 달라붙는것 같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은희는 가만히 아래배에 손을 얹어보았다. 그냥 밋밋하기만 할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내안에서 아기가 자라고있다니, 그의 아기갉 은희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래배를 쓰다듬는 손등에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이어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때문에 은희는 그만 쿠션에 얼굴을 묻고말았다. 온몸이 나른해나며 그대로 땅속으로 잦아들것만 같았다.

은희는 핸드폰 액정화면에 찍혀있는 열한개의 수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 통화버튼만 누르면 그 작은 기계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을터였다. 은희는 왼손에 꽉 틀어쥔 핸드폰으로 오른손 식지를 가져갔다. 하지만 손가락이 미처 통화버튼에 닿기전에 은희는 그만 핸드폰 뚜껑을 닫고말았다.

은희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서서히, 틈 날 때마다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뛰여와도 그 단 두번의 간단한 조작조차 완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통하고 뚜- 하는 신호음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 어떻게 할지 너무 겁이 나는것도 사실이였다.

은희는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골똘히 생각을 굴렸다. 어떻게 할가. 의사에게서 임신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은희자신이 그랬던것처럼 그 또한 이 모든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수 없을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가 받게 될 충격을 최소화시킬수 있을가. 며칠을 밤낮으로 머리를 쥐여짜도 답안은 나지지 않았다.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가. 은희는 그게 너무 궁금했고 또 두려웠다. 혹여 그가 거부와 책망이라도 보일가봐 두려워 지금까지 련락을 못하고있는건 아닌지. 은희는 누가 무거운 돌을 들어 짓누르기라도 한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견딜수 없었다.

언니 왜 그래. 거울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멍하니 서있는 은희에게 마침 양치질하러 온 같은 회사 미스 김이 물었다. 은희는 불에 덴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미스 김에게 애써 감추려던 뭔가를 들켜버린것 같은 느낌이였다. 미스 김은 은희의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며 물었다. 언니 어디 아파? 요즘 기색이 안좋아보이는데.

아냐 괜찮아.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웃어보이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는척 했지만 은희는 미스 김의 의아한 눈길이 계속 뒤를 쫓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은희는 그 눈길을 모른척하기로 했다.

은희는 자기의 신변에서 발생하고있는 일들, 특히 그와 만나고있는 사실을 철저히 단속했다. 그것이 결코 축복받을만한 일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일은 감추려할수록 궁금증이 커진다고 했던가. 요즘 주위에서 어디 아프냐는 문안을 많이 해왔다. 은희를 향한 관심뒤에는 항상 강렬한 호기심이 숨어있었다.

은희는 주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자기한테 있음을 잘 알고있었다. 은희 스스로 느끼기에도 은희는 지금 무슨 중대한 일을 겪고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얼굴은 피기 한점 없이 창백했고 걸을 때면 발이 허공에 떠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12층 사무실 창가에 서서 두꺼운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볼 때면 몸에서 혼이 쑥 빠져나가는것 같은 느낌으로 정신이 황홀해지기도 했다.

어떻게 할가, 어떻게 입을 열가. 은희는 멍하니 컴퓨터옆에 놓인 탁상달력을 바라보았다.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있는 날부터 하나 둘 셋, 십삼일이 지나있었다. 빨간 동그라미는 은희의 침실문뒤에 걸린 달력에도 그려져있을 터였다. 굳이 세여보지 않아도 은희는 십삼일이 지나있다는걸 안다. 그와 만난지, 그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날부터 십삼일이 지나있다는 표시였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은희는 달력에 그려져있는 빨간 동그라미를 보며 그 빨간 동그라미가 대표하는 날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곤 했다.

은희는 지금처럼 간절하게 그를 기다려본적이 없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에게 어느정도 습관이 되였다지만 지금처럼 그가 빨리 와주었으면 간절하게 바란적은 없었던것 같다.

언니 나 먼저 갈게. 퇴근시간이 땡 하자마자 미스 김은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 사라져버렸다. 오후에 거래처 만난다고 나간 권부장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은희는 텅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물끄러미 전화기만 내려다보고있었다.

은희는 마포숯불갈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종업원들이 분주히 탁자사이를 오가는 갈비집안에는 오순도순 모여앉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저가락을 놀리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은희는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희는 다시 주섬주섬 988번 뻐스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정거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디 떠나려는 사람처럼 표지판을 한참 쳐다보다가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두번째 신호등에서 하나 둘 셋, 백오십까지 헤고 머리를 드니 거짓말처럼 로즈화원이라고 흘려쓴 간판이 보였다. 은희는 눈이 아프도록 그 간판을 노려보았다.

대문안으로 막 쳐들어가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은희는 건물의 담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가끔 머리를 들어 우를 쳐다보기도 했다.

건물은 북경에서 손가락을 꼽을수 있는 고급아빠트답게 충분한 높이를 자랑하고있었다. 35층이라 했던가. 하나 둘 셋, 헤여보아도 다닥다닥 창문들이 겹치며 눈이 아물거려 이십층도 못가 포기하고말았다.

건물의 동쪽출입구를 지날 때 은희는 의아하게 쳐다보는 경비와 눈길이 마주쳤다. 은희는 모른척 고개를 틀어버렸다. 픽, 입귀를 일그러뜨림과 함께 영문모를 웃음이 실실 새여나왔다. 날 이상한 녀자 취급하나보지, 하기야 젊은 녀자가 대낮에 반나절씩이나 담너머로 힐끗거리고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마포숯불갈비앞까지 세번을 더 오가다가 은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조금 더 가면 동쪽출입구, 경비의 의심하는 눈길과 부딪히기전에 행동에 옮겨야 했다. 은희는 누가 부르기라도 한것처럼 곧추 대문안으로 뛰여들어갔다. 마침 도착한 엘레베터가 손님을 다 토해내기를 기다려 은희는 엘레베터를 탔다. 35라고 표시된 단추를 누르고 잠시 가빠진 호흡을 다듬었다.

엘레베터가 땡 하고 멈출 때까지만 해도 아무일도 없었다. 하지만 안내판을 따라 긴 복도를 지나 3502라고 표시된 방문앞에 섰을 때 은희의 호흡은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은희는 조화로 만들어진 리스가 걸려있는 현관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가, 여기까지 온 다음에.

이제 나는 문을 두드릴것이고 조금 있다 문 저편에서 그의 얼굴을 볼수 있겠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해질 그의 얼굴을.

몇날 며칠을 잠 못들고 뒤척거려도 은희가 찾는 해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온몸으로 간절히 바라는 그는 그런 은희의 간절함을 알고 일부러 골탕이라도 먹이려는듯 감감무소식이였다. 은희는 미칠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봐야 한다는 절박감때문이였을가. 얼굴만 봐도 무언가 결정을 내릴수 있을것 같아 근처를 미친 녀자처럼 반나절이나 헤맸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의 얼굴을 보러 온거였지, 그의 얼굴을 보고 결정을 하려고 온거였지. 머리가 어지러워 은희는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여기까지 와서 뭘 어쩌자고.

은희는 손을 내밀어 리스의 조화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치밀고 눈물이 쏟아질것 같아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고있는데 엘레베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소리…

은희는 잠시 허둥거리다가 비상구로 통한 문뒤로 몸을 숨겼다. 신발 뒤축으로 카펫을 찰찰 끄는듯한 발걸음소리는 은희의 귀에도 익은것이였다. 은희는 그만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

발걸음소리는 은희가 방금 서있던 방문앞에 멈춰섰다. 이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 소리, 자물쇠가 딸깍 하고 돌아가는 소리, 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쾅 하고 들렸다.

은희는 주춤주춤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가 사라져버린 방문앞에는 조화로 된 리스만이 아직도 진동에 흔들림을 멈추지 않고있었다. 그때 은희는 방문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물론 은희에게 들려주는것이 아니였다. 은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는 련이어 아이에게 이것저것 묻고있었다.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희는 그만 아까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말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듯 바람이 다가와 휙 얼굴을 덮쳤다. 날카로운 칼끝이 스치듯 예리한 느낌에 은희는 목도리를 당겨 얼굴을 감싸고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놓았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그래서 기온도 례년에 비해 낮다는 기상청의 보도를 은희는 어제 뉴스에서 보았다. 그러자 은희는 요즘들어 그가 나타나지 않은 원인이 바로 날씨에 있다고 자기위안을 하고싶었다. 그래 날씨때문일거야,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니가.

딸깍,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은희는 두겹으로 된 철문을 힘겹게 열었다. 이어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 은희는 숨이 막혔다. 저 철문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을가. 그와 만날수 있는 유일한 공간… 저 철문을 벗어나서는 그와 만난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이목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를 느꼈기때문이였다. 은희 역시 저 철문밖의 공간에서는 그를 향한 막무가내의 그리움을 내색할수 없었다. 두겹의 철문에 의해 구분되여있는 작은 공간이 은희의 넘치는 그리움을 다 끌어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은희는 떳떳치 못한 자격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과분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공기중에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다가왔다. 진한 담배냄새와 더불어 은은하게 공기중에 떠도는 kenzo의 남자용 향수냄새, 은희는 준비 없이 누구에게 기습을 당하기라도 한것처럼 가슴이 턱 맞혀왔다.

그는 거실에 없었다. 탁자우에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입은채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탁자우의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셋, 빨간 동그라미로부터 십칠일이 지난 날 그는 무슨 리유로 십칠일이라는 긴 공백을 만들어야만 했을가. 십칠일이라는 날자가 가져다주는 어마어마한 느낌과 그동안 혼자서 견뎌야 했던 마음고생과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안도감이 한데 겹쳐 은희는 가슴이 멍멍해났다.

은희는 닫혀있는 침실문앞에 다가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문은 기어코 삐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는 이마우에 팔을 고인채 누워있다가 은희가 문을 여는 기척에 낑 돌아누우며 왔어? 그랬다. 은희는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걸 잘 알면서도 은희는 그를 볼 때마다 더 수척해진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더 야위여보이는것은 지난번의 만남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경과한 때문일가. 은희는 겨울이면 꼭 입술이 터서 하얗게 번지는 그를 위해 회사빌딩 지하슈퍼에서 구입한 입술보호용 립스틱이 아직 포장도 풀지 않은채 그대로 가방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번도 확인한적은 없지만 은희는 그도 은희와 똑같이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싶었다. 누군가를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것이 은희와 그를 함께 괴롭히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싶었다.

은희가 대답이 없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백한 은희의 얼굴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배고파 밥 먹자, 그랬다. 은희는 그가 양복상의를 벗어 침대발치에 놓인 옷걸이에 걸어놓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를 보면 할말이 참 많은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갑자기 그에게 왈칵 매달리기라도 할것 같은 느낌에 은희는 부랴부랴 주방으로 뛰쳐나왔다. 랭장고를 뒤져 저녁준비를 하면서 은희는 속으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고있었다. 얘기를 해야겠지, 어떻게 얘기할가,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가.

그가 밥생각이 전혀 없는 얼굴로 식탁에 앉는것을 보고 은희는 와인을 꺼내 잔에 따랐다. 그는 웬 술? 하는듯한 표정으로 은희를 쳐다보다가 아무말 없이 은희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그리고 한모금 입에 털어놓고 술맛이 왜 이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은희는 술병이 절반 넘어 빌 때까지 입을 열수 없었다. 당초 술병을 꺼낼 때에는 술기운을 빌어 얘기를 꺼낸다는 타산에서였으나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머리속이 더 맑아지는 일이 이상했다. 그는 술잔에만 부지런히 손이 가고 정작 밥그릇은 저가락으로 헤집고만 있는 은희를 봤는지 아니면 보고서도 모른체하는건지 상을 물릴 때까지 한마디도 없었다.

그가 쏘파에 앉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신문밑에 깔린 TV 리모콘을 찾아드는것을 보고 은희는 초조해졌다. 조금 있으면 TV의 왕왕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울것이다.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에 은희는 그만 입술이 바싹 말라들 지경이였다. 은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오늘 집에 안가면 안돼?

그러나 은희의 입에서 튀여나온 말은 은희가 하고싶은 말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것이였다. 그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것 같은 눈으로 은희를 쳐다보다가 와락 리모콘을 쏘파에 던져버렸다.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너 처음부터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는 은희가 지금까지 들어본것중에 가장 톤이 높은 목소리를 짜증스럽게 남기고는 양복상의의 팔을 꿰며 밖으로 사라졌다. 은희는 말뚝처럼 식탁옆에 꼿꼿이 선채 그가 사라진 현관문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그래 처음부터 이러지 말자고 했지,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러지 않으면 안되는걸 어떡해.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어쩔수 없이 번지는 눈물과 공기중에 은은히 떠도는 kenzo의 남자용 향수냄새를 느끼며 은희는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있는 건 아닌지 몽롱해졌다. 꿈에서라면 혼자서 벅차게 마주해야할 현실을 피할수 있을것 같았다.

은희는 벤치에 몸을 한껏 구기고 앉아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았다. 흰 눈이 덮인 호수는 가족단위로 스케이트와 미끄럼을 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발가는대로 걷다가 발견한 이름모를 작은 공원이였다. 공원을 하염없이 헤매다가 다리가 아파서 눈에 띄는대로 벤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았을 때 정수리우에 있던 태양은 지금 서산에서 나불거리고있었다.

애기 낳을거예요? 수술할거예요? 간호사는 다분히 짜증이 섞인 어조로 직업적인 질문을 던졌다. 은희는 수술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섬찍함에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런 무서운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간호사의 핑크빛 루즈가 발려진 얄팍한 입술이 무슨 괴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은희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무작정 병원에 오긴 했지만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였다. 그에게는 여전히 말을 꺼내지 못한 상태였고 은희 역시 하루 24시간 똑같은 생각이 머리속을 맴돌아도 이렇다할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간호사의 다그치는듯한 시선을 피해 은희는 복도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몇몇 임산부가 긴 걸상에 앉아 순번을 기다리며 불룩 솟은 배를 자랑스럽게 어루만지고있었다. 그녀들의 행복한 표정이 은희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방금전 간호사가 했던 수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울컥,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것 같은 느낌에 은희는 다급히 간호사에게 돌아섰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급하게 말했다. 낳을거예요, 저 애기 낳을거예요.

낳을거면 출생허가증명을 받아와야 해요. 현지호구 아니죠? 그럼 호구소재지 가두판사처에서 출생허가증명을 받아오세요. 다음번에 올 때는 출생허가증명을 가져와야 병원에서 접수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셔요. 간호사는 금방 기지개라도 켤듯 나른하게 말하고는 들어가도 된다는 표시로 맞은쪽 의사의 방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은희는 출생허가증명이 처음 들어보는 말이였지만 어렴풋이 그와 련관됨을 짐작했다. 더이상 미룰수 없었다. 끝까지 그가 모르고 지나갈수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의 핸드폰번호를 누르는 손이 떨렸다. 딸깍,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들으며 은희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옆자리의 임산부에게까지 들릴가봐 조마조마했다. 현장에 나와있는듯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은희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기계소리때문일가. 네 김명식입니다, 하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씩씩하게 들렸다. 은희는 그의 목소리가 씩씩하다는 사실에, 적어도 현재 그의 기분이 그런 얘기를 꺼내도 괜찮은 상태에 처해있다는 사실에 그만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씩씩한 목소리는 은희임을 알자 언제 그랬던가싶게 담담하게 바뀌였다. 나 지금 바빠, 무슨 일인데?

저어기, 할말이 있어서… 퇴근후에 좀 볼수 있을가. 은희는 잠시 그의 빠른 변화에 적응할수 없어서 허둥거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안돼, 하는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 전화를 툭 끊어버리기라도 할것 같아 핸드폰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할 얘기 있으면 지난번 만났을 때 할거지. 너답지 않게 바쁜 사람을 자꾸 불러내고 그래. 그는 언제부터 이런 책망이 섞인 말투를 쓰기 시작했을가. 은희는 그것이 어떤 징조를 의미하는것 같아 불안해졌다.

나 지금 병원에 와있어. 은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갑자기 어떤 위급한 상황이라도 발생한 모양인지 화이트와 핑크 가운차림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복도를 분주히 오가고있었다. 은희는 맞은쪽 플라스틱의자의 녹쓴 철제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떨지 않으려고 꽉 깨문 이발사이로 마지막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산부인과야.

기계가 잠시 작동을 멈추었는지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만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은희는 석고로 빚은듯 딱딱한 자세로 핸드폰을 귀가까이로 바싹 갖다 댔다. 흐음, 그는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잠시 침묵했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그의 목소리는 짧은 시간내에 바람이 확 빠져버린 풍선처럼 푹 가라앉아있었다. 은희는 신호음이 한참이나 빽빽거려서야 천천히 핸드폰 뚜껑을 닫았다.

스케이트를 어깨 앞뒤로 걸쳐멘 젊은 남자가 무릎우에 머리를 파묻고있는 은희를 힐끗 쳐다보고 지나갔다. 저 녀자 실련했나봐. 바람을 타고 그 남자가 친구한테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은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머리를 들었다. 마침 그 남자의 친구인듯한 사람이 은희를 돌아보다가 은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킥킥 웃으며 뛰여갔다.

호수를 북새통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흰 눈우에 엷은 어스름이 장막처럼 내리기를 기다려 은희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공원 대문은 안으로 빗장이 찔려있었다. 관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문옆에 딸린 경비실 창문으로 목을 빼들고 기웃거리다가 은희를 보고 삿대질했다. 아니 아까 공원문 닫을 시간 됐다고 여러번이나 방송했는데 못들었소?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녀자 혼자 쏘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진단 말이오? 은희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수굿하고 대문앞에 버티고 섰다. 관리원은 뭐라고 계속 궁시렁거리며 못마땅한 눈길로 은희를 곁눈질했다. 파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제대문을 빠져나오자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들렸다.

은희는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앉아 오른손에 움켜쥔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술잔이 움직일 때마다 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잘랑잘랑 귀를 간지럽게 하고있었다. 은희는 그 소리를 무슨 음악처럼 즐기고있었다.

카페안에는 후이쟈(回家)라는 제목의 색소폰음악이 흐르고있었다. 은희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이였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가다, 그래 돌아갈 집이 있다는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은희는 턱을 높이 쳐들고 술잔에 남아있는 술을 입안에 탈탈 털어넣었다. 겨우 한모금 넘겼을뿐인데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 댕강댕강 들렸다. 여기요. 은희는 팔을 번쩍 쳐들었다. 까만 나비넥타이의 웨이터가 은희앞에 뛰여와 허리를 굽혔다. 한잔 더. 웨이터는 알았다는듯 머리를 주억거렸다.

은희는 카페안을 둘러보았다. 모든것이 그대로였다. 거리를 향해 난 시원한 통유리창도 그대로였고 벽에 걸린 티베트의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장식품도 그대로였으며 계산대뒤에서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로우반의 불룩 튀여나온 배도 그대로였다. 달라진것은 단 하나, 그가 곁에 없다는것뿐이였다.

그를 처음, 아니 다시 만났던 곳이다. 어찌어찌해서 합석한 자리에서 친구의 친구라고 소개받은 그를 보았을 때 은희는 심장이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그를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그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은희에게만 시선을 주고있다가 은희가 집에 간다고 일어서자 따라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바래다줄게.

은희는 술잔을 입술에 붙이고 갈증에 목마른 사람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그때 둘이 아는 사이인가보다, 놀리는 친구들에게 아니라고 얼굴을 붉히던 그처럼 은희도 처음부터 그를 모른척했더라면 오늘에 이르지는 않을수 있었을가. 은희는 오늘은 반드시 취하도록 마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술잔에만 매달렸다.

담배나 술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건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시죠? 특히 임신초기 3개월은 태아의 각종 장기가 형성되는 시기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의사가 주의를 주던 말이 생각났다. 아기를 생각하자 은희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가야, 너를 가지고도 엄마는 이렇게 외롭단다.

그럴리가 있겠어? 얼마나 조심했는데… 퇴근시간이 지나고도 집에 가기 싫어 미적거리고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은희는 침묵만 지켰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느끼자 은희는 처량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많은 시간동안 혼자서 해봤던 수많은 상상중에 이런 상황만은 포함되여있지 않았다. 은희는 덩치만 봐도 질것임이 틀림없는 뻔한 상대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라운드밖으로 밀려난 씨름선수처럼 허망한 느낌이였다.

- 저기, 여기 합석해도 괜찮을가요?

점점 무거워지는 머리대신 점점 맑아지는 정신으로 빈 술잔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은희의 귀에 어떤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네모진 얼굴에 촌스런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모직코트와 머플러를 손에 든채 엉거주춤 서있었다.

편한대로 하세요. 은희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나 지금 그럴 기분 아니니까 가당치도 않은 수작 부리지 말고 그만 가보세요, 평소의 은희라면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발딱 세울터였다. 하지만 남자의 순박한 외모에서 살짝 엿보이는 진실함이 은희의 섣부른 방어를 힘없이 무너뜨렸다. 그만큼 은희는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기대고싶을 정도로 절박한지도 모른다.

남자는 옆자리에 코트와 머플러를 차곡차곡 개켜놓고 돌아앉아 종업원에게 마티니를 한잔 주문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은희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은희는 남자의 눈길을 무시하고 오로지 엄마의 가슴을 탐닉하는 어린 아기처럼 술잔에만 매달렸다. 남자의 눈에 서서히 강렬한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셔요,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몸에 안좋잖아요. 마침내 은희가 얼음만 남은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은희는 못들은척 다시 팔을 번쩍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이 사람이 한잔 사겠대. 이 사람하고 같은걸로 두잔 더. 남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은희를 쳐다보았다. 은희는 최대한 당돌하게 그 얼굴을 마주보았다. 남자의 눈길이 안경속에서 스르르 풀어지는가싶더니 웨이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술이 나오자 은희는 남자를 향해 고맙다는 뜻으로 술잔을 그의 눈앞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남자의 얼굴에 이제는 호기심이 아닌, 라지오를 처음 접하는 중세시대의 사람처럼 신기하고 놀라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더는 은희를 막지 않았다. 은희는 목숨을 건 사람처럼 술잔에만 매달렸고 남자는 그런 은희를 유심히 지켜볼뿐이였다.

됐어요. 이제 그만 집에 가요. 은희가 다시 웨이터를 부르려고 하자 남자가 갑자기 팔을 내밀어 은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은희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 버둥거렸으나 남자의 힘을 당해낼수 없었다. 이거 놔, 내 술을 내가 먹겠다는데 왜 그래. 은희는 남자를 향해 악을 썼다. 온몸을 다해 힘을 쓰는 바람에 헐겁게 머리를 틀어올린 핀이 빠지며 기다란 생머리가 어깨우에서 출렁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술은 그렇게 먹으면 못써요. 이제 나하고 집에 갑시다. 남자는 어린 아기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은희의 손목을 잡지 않은 다른 한손으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했다. 은희는 남자에게 손목이 잡힌채 밖으로 끌려나왔다. 남자는 문앞에서 기다리고있던 택시의 뒤문에 은희를 밀어넣고 자기도 옆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가요? 백미러를 통해 택시기사가 남자에게 턱짓으로 물었다. 남자는 은희를 돌아보았다. 은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요? 남자의 말투는 금방 만들어낸 신선한 요플레처럼 부드러웠다. 은희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며 학원로,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은희는 남자를 상관하지 않고 싱크대 수납장에서 와인을 한병 꺼냈다. 잔에 가득 따른 와인을 음료수처럼 꿀떡꿀떡 마시고 남자에게도 한잔 내밀었다.

남자는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문득 은희에게 실련했어요? 물었다. 은희는 그만 픽 웃음이 나와 하마터면 입안에 물고있던 술을 내뿜을번했다. 실련, 가당찮게 실련이라니.

물어볼게 있어요. 당신에게 애기를 낳아주고싶은데, 어때요? 술기운때문인지 갑자기 재미있는 장난을 하고싶었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은희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은희는 쏟아지는 웃음을 참을수 없어 허리를 뒤틀며 쏘파우에서 대굴대굴 굴렀다. 과음한 술이 찬바람을 쐰때문인지 머리가 빠개질것처럼 아팠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혀가 딱딱하게 굳어 말을 똑똑하게 번지기조차 힘들었다.

왜? 싫어? 아니 생각 좀 해봐. 애기 공짜로 낳아준다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고 마누라하고 애기를 공짜로 얻는데 그래도 싫어? 남자는 무슨 괴물을 보는듯한 끔찍한 표정으로 은희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따라온걸 은근히 후회하는 눈치였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한사람은, 적어도 한사람만은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모든것을 다 포기할수 있다고 하던 때는 언제고… 은희는 멀거니 풀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렁그렁 번지는 눈물때문에 그의 모습이 남자의것과 한데 겹쳐 춤추고있었다. 고등학교때 내리 3년을 짝사랑했던 그, 우연 아닌 인연으로 다시 만나 은희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던 그, 다시 만난 날 사실 나 그때 널 많이 좋아했었어 하며 얼굴을 붉히던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은희의 눈을 들여다본다. 괜찮아? 그렇게 묻는것 같기도 하다.

괜찮지 않아요. 괜찮을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너무 많은걸 바란게 아니에요. 그저 빈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줄수 없어요? 많이 힘들지? 괜찮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거야. 이렇게 말이예요. 근데 왜 그렇게 얼음처럼 차갑게 구는거예요?

은희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쏘파에서 부시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머리가 닿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은희는 풀썩 힘없이 넘어졌다.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앞으로 꼬꾸라지는 은희를 끌어안았다.

은희는 몇발짝 떨어진 곳에서 병원간판을 쳐다보았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병원》이라 씌여져있는 지극히 평범한 간판이였다. 은희는 거기에서 꼭 뭔가를 찾아내야 하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간판만 쳐다보았다. 이제 곧 여기서 일어나게 될 일들은 영원히 내 기억속에 남아있겠지, 설사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더 얼쩡거리다간 마음이 변할것 같아 은희는 허겁지겁 대문안으로 뛰여들어갔다. 3층입구로 통한 계단에 들어서자 낯익은 간호사가 은희를 보고 아는척을 했다.

저기, 의사선생님이 오늘 오라고 해서… 예약이 돼있을거예요. 간호사는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은희는 간호사를 따라 좁고 긴 복도를 지나 “3”이라는 수자가 표시되여있는 진찰실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좀 있으면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거예요. 간호사는 다분히 직업적인 딱딱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복도 저쪽으로 사라졌다.

은희는 다리를 모으고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인고도에 혼자 남겨진것처럼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할수밖에 없을가. 보름달처럼 둥실 솟아오른 배를 쓰다듬던 임신부가 은희를 보고 방긋 웃었다. 빨리 나오고싶은가봐요. 자꾸 안에서 치고 박고 난리지 뭐예요.

은희는 세상의 온갖 행복을 다 차지하고있는듯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웃어보려고 얼굴을 실룩거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확 솟구쳤다. 눈물은 걷잡을수 없이 볼우로 번졌고 은희는 녀자의 의아한 눈총을 뒤에 달고 허겁지겁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옥상으로 뛰여올라갔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눈물이 둑 터진 보물처럼 흘러내렸다.

통장 한번 확인해봐. 늦은 밤 은희를 깨운 전화에서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희는 처음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통장? 갑자기 웬 통장얘기냐고 물으려다 머리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은희는 전화기를 꽉 틀어잡은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은 이렇게 끝나고마는것을.

은희의 짐작이 미처 확인하기도전에, 전화기에 대고 바락바락 악이라도 한번 써보려던 은희의 작전이 미처 실행되기도전에 그는 전화기를 놓아버렸다. 은희는 단조로운 신호음이 빽빽거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멍청하니 앉아있었다. 어두운 스탠드 불빛에 침대 발치에 외로이 서있는 옷걸이가 보였다. 그가 올 때마다 양복을 걸어놓곤 하던 옷걸이, 그 옷걸이는 이제 무용지물이 돼버린것이다.

통장 한번 확인해봐, 하던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자 은희는 날카로운 무엇으로 잡아비틀기라도 하듯 가슴이 아팠다. 수십번 려과를 거친 물처럼 순수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던 그와의 관계가 결국은 통장 하나로 끝날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마무리를 하려는 그에게 처음으로 원망 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다. 기껏 나를 그런 사람으로 취급하다니.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희 스스로의 립장일뿐이였다.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런 결말을 작성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깨끗하게 은희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할 몫은 다 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함으로써 은희에게 한점 미안함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화장을 고치고 3층 복도에 들어서는데 진찰실쪽에서 은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희는 서둘러 대답하고 진찰실로 걸어갔다. 적십자표시가 새겨진 하얀 칸막이를 드리운 진찰실 문앞에 서서 은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도 못할거 없어. 이렇게 된이상.

은희는 문을 닫고 돌아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대로였다. 유리를 깐 식탁과 식탁밑에 다리를 붙이고 마주한 두개의 의자, 식탁과 사선 방향에 누워 있는 쏘파. 무언가 조금이라도 변해있어주었으면 하는 은희의 바램을 뒤집고 그것들은 말 잘듣는 충실한 개처럼 원래의 위치를 고집하고있었다. 하기야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라고.

은희는 무너지듯 쏘파에 주저앉았다. 크림색 가죽쏘파가 무게에 눌려 빠지직, 소리를 냈다. 은희는 넋이 나간듯 맞은쪽 서랍장을 퀭하니 바라보았다. 서랍장의 꽃병과 곰돌이와 사진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눈물이 후두둑 손등에 떨어졌다. 처음부터 흔적을 남기지 않기로 작정을 했던걸가,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그 많은 사진액자들속에 그의 사진 한장 없다니.

은희는 미친듯이 네발걸음으로 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손에 걸리는것은 닥치는대로 움켜잡고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했으나 그의것으로 보이는것은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은희는 손가락끝에 묻어있는 먼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방에 남아있는 유일한 그의 흔적이라고 믿고싶었다.

변한것은 아무도 없었다. 은희를 빼고는.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일상으로 돌아갈것이다.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부인옆에서 이쯤에서 끝내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있을지도 몰랐다. 가끔, 아주 가끔 은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다가도 곧 아이의 부름소리에 잊어버릴테지.

은희는 서랍에 소중히 모셔두었던 일기책을 꺼내들었다. 그와 만나고있는 동안 사용한 일기책이였다. 은희는 일기책을 북북 찢어 바닥에 쌓아올렸다. 그리고 라이터불을 가져다댔다.

가능하다면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깡그리 소멸하고싶었다. 턴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훌쩍 건너뛰듯이, 그래서 2년전 그를 만나기전의 은희로 거듭나고싶었다.

처음부터 게임에는 법칙이 주어져있었다. 당연히 게임의 결과도. 은희는 그것을 알고있었다. 세사람가운데 언젠가 어느 한사람은 상처를 받게 되리라는것을. 하지만 은희는 노력만 하면 그 결과를 어느 정도 바꿔놓을수도 있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잘못된 생각이였음이 드러났다.

은희는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속에 그날 은희를 바래다주는 택시안에서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날줄 알았다면… 하면서 쑥스럽게 두손을 마주 비비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한마디를 이미 매인 몸에 대한 후회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면, 그래서 게임의 결과를 미리 알고있으면서도 게임에 참여한것이라면 은희에게 이 게임은 얼마나 억울하고 한탄할만한 결과일가.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뿌연 재들만 남아 푸석거리고있었다. 열린 부엌 창으로 바람이 불어와 재들은 금방이라도 날려갈듯 위태롭다. 은희는 멍하니 바람에 휘적거리는 재를 바라보았다. 기쁜지 슬픈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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