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민학회발표문 - 권준희

*  이 논문은 미완성본이니, 절대 인용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2004년 7월

서울. 한 조선족 교회. 87 일간의 농성 끝에 재외동포법 개정 통과. 하지만, 농성에 참여한 조선족 동포들은 여전히 불법체류자였다. “오늘은 몇 명이 잡혀 나갔다더라” 라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개정된 재외동포법은 여전히 조선족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농성 끝에 다시 교회 합숙을 시작하면서, “전의”를 가다듬지만, 불법체류 단속에 대한 공포와 바닥난 은행잔고에서 오는 스트레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한국정부로부터 “같은 민족”에 대한 “너그러운” 처사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2007년 7월

연변. 2006년 4월에 시행된 법무부의 자진출국 프로그램으로 집에 돌아왔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7년간, 그동안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조선족 동포들이 이제 몇 달 후 한국으로의 재입국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좋은 것도 잠시, 한국에서 벌어온 돈은 금새 또 바닥이 나고 있다. 중국에 있는 것도 --조선족식 표현으로-- “멋이 없다.” 한국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몸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2008년 7월

서울. 재입국동포들은 이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불법이라 벌벌 떨 이유도 없어졌고, 이제는 마음껏 벌다가 가면 된다. 단,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아프지 않아야 한다. 가끔씩은 친구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지만, 놀면 뭐하나,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방문취업제로 들어온 풋내기들과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몸에 일이 배겨서”. 이번에는 돈을 잘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식구들의 환갑잔치나 아이들의 결혼식, 설날에 집에 다녀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I. 문제제기

1999년, 심각한 경제금융 위기 속에서 제정된 재외동포법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 재외동포를 규정함으로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외국으로 이주한 동포들 중, 대한민국 국적을 가져본 적이 없던 자를 제외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 때 대규모의 조선인들이 만주 및 일본으로 이주했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중국의 조선족, 구소련의 고려인,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은 재외동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지만, 이 법은 이들을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함으로써, 일부 재미교포와 같은 “돈 있는 동포”들만을 위한 특혜법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해 왔다. 재외동포법에 포함되는 동포들은 내국인에 준하는 자유입국, 재산투자, 의료보험등의 혜택을 받지만, 이 법으로부터 제외된 동포들은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불법” 통로들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 결과, 재외동포법은 밀려드는 중국과 구소련의 동포들을 “불법체류자”로 양산해왔으며, “적절한” 재외공민과 “부적절한” 재외공민을(Ong 1998) 구분함으로써 재외동포를 시장적 가치에 따라 평가하였다.

이 논문은 중국사회주의의 개혁과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치솟는 물가와 축소된 복지혜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주를 삶의 “돌파구”로 선택한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일과 삶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사회의 변화와 맞물린 이른바 “한국바람”으로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대한 “소문”과 “환상”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오랫동안 냉전의 정치학 속에서 형성된 “적국 한국”의 이미지는 “발전”과 “풍요”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한국이라는 “고국”의 경제발전과 “문명한” 사회에 대한 환상과 기대는 조선족 사회 내에 한국이주에 대한 집단적인 “최면”을 걸었고,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조선족 이주를 통해서 지난 20년간 조선족 사회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위의 짧은 묘사에서 언급하였듯, 대규모 조선족동포들의 체류조건이 급격하게 변화된 데에는, 재외동포법 개정에 따른 불법체류 동포의 자진출국 유도에 의한 대규모의 사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2003년 말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동포는 총 118,300 명이 체류하고 있었고, 67.4%에 이르는 79,737명이 불법체류자로 파악되고 있지만, 출입국관리소 2008년 9월30일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동포 384.731명 중 불법 체류 비율은 7.9%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체류조건의 급격한 “정상화”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논문은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국의 재외동포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복합적인 삶의 조건이 그 동안의 법적 변화와 교차하면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본 연구자는 2004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한 서울지역 거주 조선족 노동자들에 대한 인터뷰 및 관련 단체 참여관찰에 기반하여, 2004년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조선족 동포들이 2006년 대규모 사면이후 단순노동취업을 위한 H-2 비자로 체류조건이 통합되면서, 그들의 노동 및 삶의 조건이 한국사회 내에서 어떻게 재조정 되어 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II. “가짜”의 연쇄 고리- 일상화된 “불법” 이주 시장

2004년 당시 본 연구자가 인터뷰한 서른 명의 여성 조선족동포들 중 “합법” 체류자는 단 한명이었다. 그 한명은 본인의 딸이 한국남성과 결혼하면서, 부모초청 비자를 받게 되어 갓 들어 온 상태였다. 하지만, 나머지 스물 아홉 명은 90년대 초중반부터 다양한 “불법” 통로를 통하여 입국하였고, 그중 세 명은 추방 당한 이후, 또 다른 “불법” 통로를 통하여 재입국했다.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이 “불법” 체류자가 된 데에는 처음부터 불법 브로커를 통하여, 여권 및 신분증 등 문서를 위조한 경우도 있지만, 여행이나 공무비자를 통하여 입국한 후 체류기간을 넘겨 버린 경우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해외여행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한국으로 입국하면서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여권 발급 및 필요한 서류등을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브로커를 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브로커에게 돈을 내면, 여권부터 입국까지 “깔끔하게” 처리해 주지만, 브로커로부터 반복적으로 사기를 당해, 한국 돈으로 천 만원 이상의 빚을 지게 되어 한국행이 더 절박해 지는 사례들도 여럿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은 외국 여행 절차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고, “소문”을 통해서 알았거나, 아는 사람이 통했던 브로커를 소개받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한국행에 대한 절차나 과정은 “지식”이나 신빙성 있는 “자료”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언제나 “누구는 어떻다더라” 라는 소문에 의존하게 되어, 한국행에 대한 “성공”은 운에 달려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따라서, 한국행이 문제없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인 브로커를 만난다거나, 출입국사무소를 무사히 통과한다거나 하는 등 이주과정 절차상에서 “고도의 행운”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돈을 적게 내고 갈수록, 사기를 안 당할수록, 불법이라도 경찰한테 안 걸릴수록, “나는 운이 좋았다”라고 스스로의 경험에 대하여 해석하게 된다. 또한, 불법 브로커를 통한 조선족의 이주의 과정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쉽게 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따라서 가격화되어 있지만, 이 시장에서 다양화된 상품을 선택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철저하게 시장화 된 조선족 사회 내 이주 시장에서, “이주상품”은 정해진 공정에따라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소문과 수요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운이라는 우연적인 확률에 의존하게 되고, 고액의 수수료와 “풍요한 미런에 대한 가능성이 맞교환 되는 것이다. 다음의 사례들은 “가짜 이주상품”들이 어떻게 판매되고, 유통되며, 확대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연변에서 온 A 여성은 1999년 한국에 입국했다. 그녀는 화룡에서 북한으로 장사를 다니거나, 과일 장사를 하다가, 본인도 한국바람에 휩쓸렸다고 했다. 미국이나 일본도 생각해봤지만, 한국에 가는 것보다 두 배 이상 더 비싸고, 거기에 가면 말도 안 통해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여성은 한국으로 “시집간” 동네 여자를 딸 삼아서 한국에 왔다. 그 딸의 부모가 한국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부모초청 비자를 “시장”에 내 놓아서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이다.

동네 여자 딸의 엄마 여권으로 왔다. 그 엄마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기 때문에, 한국에 올 때 난 최대한 늙어 보이려고 했다.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 빚고. 게다가, 가족관계를 물어볼 것에 대비해서, 나는 그 집 가족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완벽하게 그 집 가족처럼 보이기 위한 연습을 하려고, 그 집에 가서 이틀동안 지냈다. 그 동네여자가 정말 내 딸처럼 여겨지도록

2004년 인터뷰 당시, 한국으로 “시집” 간 조선족 여성들은 부모를 초청할 수 있었고, 부모는 3개월간 체류가 가능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진짜” 부모이든, “가짜” 부모이든, 3개월을 넘길 것을 계획하고 한국에 입국하기 때문에,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얻게 되는 “부모초청” 비자는 다양한 이주상품과 불법체류자를 생산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길림성에서 1997년에 입국한 B여성은 중국에서 농민으로 어렵게 살았다. 브로커를 통해서 한국 돈 천 만원을 지불하고, 한국남성과 “위장결혼” 한 여성의 “가짜엄마”로 한국에 왔다. 일단 한국에 입국하는데 “무사히” 통과하기는 했지만 3개월 후 불법체류자가 되어 버렸고, 추방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한국에 와서 수면제 천 알은 먹었다” 고 한다. 같은 여관에서 3년째 같은 월급 100만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던 이 여성은 절대 외출을 안 하며, 친구들도 안 만나고, “오는 날부터 하루도 안 쉬고 일했다고” 한다. “위장결혼” 한 여성의 “가짜 엄마”로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 이 여성도 빚을 지고 왔다. 이 빚을 다 갚지 못하고, 그 이상의 돈을 벌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한 고생은 헛것이 된다고 믿었다. 때때로 경찰단속이 나오지만, 카운터에서 경찰이 “뜨면”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뒷문으로 도망쳤다가, 경찰이 가고 난 뒤 다시 돌아오곤 했다. 2004년이 되면서, 단속이 훨씬 더 강화되어, 스트레스로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흑룡강에서 2000년에 입국한 C 여성은 한국에 “시집온” 딸의 엄마로 수속을 시작했지만, 브로커에게 한국 돈 5백만원 정도 사기를 당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 남편은 밀항을 했고, 이 여성은 한국에 가기 위해서 백방 소문을 하다가 만나게 된 조선족 남성이 동포 1세로 인정받으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어, 이 남성과 “가짜결혼”을 하게 되었다. 본인도 남편(진짜)도 모두 불법이라, 합법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이 가짜 남편이 국적을 땄기 때문에 나도 한국에 국적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 남자한테 돈을 얼마주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애들이 다 중국에 있는데, 한국국적을 따면 다시 중국에 가기도 불편하고, 그래서 그냥 불법이 되기로 했다.

위의 세 사례들이 밝혀주듯이, 조선족 사회 내 이주노동시장에서는 어떠한 한국인과의 친족관계도 “상품화” 되어 거래된다. 수많은 익명의 관계들이 “가짜이든”, “진짜이든” 친족관계로 재형성 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한 이주 “파생상품”은 수많은 “가짜” 여권과 새로운 친족관계의 연쇄 고리를 만들어 낸다. 진짜 결혼의 진짜 엄마, 진짜 결혼의 가짜 엄마, 가짜 결혼의 가짜 엄마 등등 어떠한 작은 가능성도 모두 상품화되어 수 백만원에서 수 천만원에 이르기까지 거래된다.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은, 이와 같은 문서 및 여권 위조를 통하여 불법적인 거래관계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소개 받으면서 불법 시장을 확대 재생산 해 왔다. 또한, 브로커들은 조선족 사회 내 팽배한 한국에 대한 환상과 소문들을 적극 활용 해 “이주상품”에 대한 “소비”를 부추기면서, 새로운 상품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유통해 왔다. 이 공모의 관계는 방문취업제가 시행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III. "거의 한국 사람처럼“- 불법체류자 추방에 대한 전략과 준비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불법체류자로 거주하고 있던, 2004년 7월, 서울 한 조선족 교회에는 추방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사실, 법무부의 추방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잡혔는갚는 전적으로 운에 달려있다고 조선족들은 믿는다. 때로는 동료 한국인이 경찰에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 “국적을 딴” 동료 조선족이 경찰에 고발하기도 한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고발은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원한 관계”를 만들지 않거나, 아예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체류조건에 대한 보호를 하기도 한다. 다음의 사례들은 추방의 위험과 스트레스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조선족노동자들이 다른 동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추방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지 그 방법을 보여준다.

흑룡강에서 1998년에 입국한 D 여성은 브로커에게 세 번 사기를 당해서, 한국 돈으로 2천 만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여성은 “악을 쓰고” 한국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한국에 온 남편이 돈을 모아 보내주면, 브로커를 통해 다시 한국입국을 시도했다. 중국에서 농민으로 산 이 여성은 한국행을 시도하면서 지게 된 빚 때문에 한국에 나오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한 절대적인 목표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 입국한 후, 가정집 식모, 농촌 채소 모종, 식당 파출부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마사지를 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닌 후, 목욕탕에서 마사지도 제공하는 “때밀이” 아줌마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법체류 신분으로 이 여성은 주위 동료로부터 시달림과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고 한다.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난 내가 불법이라고 절대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신분이 명확하지가 않으니까, 다른 한국인 동료들에게도 할 말을 다 못한다. 손님들도, 매점직원도, 다른 때밀이 아줌마도, 내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일단 무시하려고 든다. 손님이 나한테 더 많으면, 같은 값이면 중국년 돈 더 많이 벌어 주게 하냐면서 내 손님도 채어 간다. 또, 내가 일하는 동안, 손님이 매점에 마사지 값 4 만원 맡기고 가면, 만원 떼어먹고, 3만원만 나한테 준다. 그런데 나는 불법이라고 말은 안했지만, 괜히 싸움 나서, 그 사람들이 나를 신고할까봐 말도 못하고. 또 내 보증금을 맡겨 놓고 일하니까, 확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다

이 여성은 한국인과의 경쟁관계 속에서 부당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본인의 “권리” 따위를 섣불리 이야기 했다가는, 경찰한테 붙잡혀 갈 수 있다고 판단해 어떠한 갈등관계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언어상의 차이 때문에 “중국교포”라는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지만, 조선족 동포들은 자신의 신분을 명확하게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에 종종 직면한다. 특히, 불법체류로 심한 위협이나, 또는 추방을 경험한 동포들의 경우 신분 노출을 철저하게 꺼린다.

심양에서 온 E 여성은 소학교 졸업 후, 농촌에서 농사만 지었고, 중국인들과 섞여 살지 않아, 중국어에도 익숙하지 않다. 특히, 문화혁명기 소학교를 다녀서, 신문이나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본인은 “까막눈”이라고 했다. 한국에 “시집 온” 올케가 1992년에 초청해서 한국에 왔다가 체류기간을 넘기면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1년3개월 한국에서 체류한 후,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외국인 보호소에 호송을 당한 후 중국으로 추방당했다. 그런데, 중국에 돌아가 보니, 본인이 그동안 보내준 돈으로 남편은 “새살림”을 차렸고, E여성의 어머니는 이혼을 무조건 반대해서, 중국에서는 더 이상 살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밀입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연변지역의 조선족과는 달리, 심양지역에서 온 이 여성은 “북한식” 사투리가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한국인들처럼 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95년, 밀입국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후, 이 여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본인이 중국에서 왔다고 밝히지 않는다.

지금 일하는데서 내가 불법인줄 몰라. 단속 걸려도, 죽어도 집에 가면 안 된다. 나는 중국가면 못살아, 할 일도 없고. 마작하고, 술 먹고 놀고, 그리고 남편 꼴을 내가 어떻게 보나

조선족 동포들이 불법체류를 계속 연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빚을 다 갚지 못했거나, 빚을 갚느라고 충분한 돈을 저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잡힐 때까지 일단 벌고 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기도 한다. 따라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면서, 불안하게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 흑룡강에서 1994년 한국에 입국한 F 여성은, 아들, 며느리, 사위, 딸, 작은 아들이 모두 불법체류자이다. 남편이 국적신청을 해서 지금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불법체류자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내가 생활용품을 사면서도, 내가 이거 왜 사나, 언제 잡혀 갈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안 사게 된다. 내가 현장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2억도 더 벌었다. 그런데, 형제들 빌려주고, 사기 당하고, 내 평생 죽어도 원 없을 만큼 돈을 벌고 썼다. 하지만, 언제 집에 가야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9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위의 사례들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불법체류자로 체류하였지만, 우발적인 경찰의 단속이나 추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위험에 대해 방어하고 준비하는 것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또한 “거의 한국사람 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신분 노출에 대하여 극도로 조심을 하더라도, 그 내부적인 긴장과 갈등은 일상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의 오랜 “불법체류자”로서 한국에서 체류했지만, 한국은 “잡힐 때”까지만 버티는 공간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오랜 체류를 계획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좀 더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환상과 계획은 “잡히는 순간” 모두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2004년 당시 추방에 내 몰린 대다수의 조선족동포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떻게 같은 민족한테 이럴 수 있냐고.”

<다음에 이어>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