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관주인의 조카는 최진을씨댁으로 안내했다. 오래된 초가집 작은 마당에 탈곡기를 놓고 뽀오얀 먼지속에서 탈곡을 하던 키작은 로인이 인사를 해왔다. 집으로 들어갔다. 품바꿈으로 일손을 돕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집으로 들어왔다.

최씨는 뒤울안에서 허름한 종이상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그속에서 화석을 꺼내놓으면서 공룡이발이라고 부언했다. 공룡인줄은 어떻게 알았는가고 물었더니 려관집 조카가 길림사범대학의 고고학 교수한테 가서 감정을 거쳤다는것이였다. 그 진실여부는 나하고 별개의 문제였다. 진짜공룡화석이라면 연변고고학연구에서의 하나의 사건이 됨직한 일이고 공룡이 아니라 하더라도 귀중한 옛 짐승의 화석임은 분명하므로 역시 연구가치는 있다고 생각되였다. 이발의 길이는 40cm, 너비는 10cm, 높이는 15cm인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밭고랑같이 패여들었다. 두 이발사이의 거리는 40cm, 주둥이의 크기가 한아름은 되였을것이다. 턱 뼈는 너비가 15, 길이가 22, 굵기가 7cm나 됐으나 완전하지는 못했다.

<<재작년(1993년) 8월 개바위밑으로 난 길을 넓힐 때 발견한검다. 이나마 가진것이 다행입네다. 도로일군들이 막무가내 바수어대는걸 빼앗아왔디요. 큰일을 치를번했수다. 일군들 말을 들으면 애초 크기는 10m가 넘었다고 그래요. 허리가 휘우듬한것이 똑 올챙이같았다고 합데다. >>

최씨는 이야기했다.

논김을 매다가 화석이 발견되였다는 전갈을 듣고 도로작업현장에 달려갔을무렵에는 이미 화석이 몇동강이 난 뒤였다는것이다. 뼈를 가루내여 먹으면 만병통치라고 누군가 <<유식한>>말을 했는지 화석은 메에 맞고 불에 그을리는 모진 수난을 당한 뒤였다. 심술궂은 사람들은 또 화석을 두만강에 돌팔매치듯하기도 했다. 최씨는 가까스로 텩뼈 일부와 이발 몇점을 건졌다는것이다.

<<소문을 듣고 연변박물관에서 왔재임둥. 수고비를 주겠으니 팔라는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림둥. 한국에 팔면 떼돈일텐데…>>

나는 입밖으로 새여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떼돈이 되는 물건>>을 허름한 종이상자에 넣어서 뒤울안에 <<정히>> 보관하고 밤이나 낮이나 돈낟가리를 쌓았을 최씨가 우스웠다.

그 전해부터 한국의 골동품장사군들이 중국대륙을 휩쓸고 다니며 일으킨 골동품에 대한 <<계몽운동>>의 물결이 치벽한 이곳 산촌에까지 파문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리기도 했다.

조선으로 다녀오는 어떤 조선족들은 물고기로부터 골동품밀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돈이 된다면 뭐든지 다한다. 숭선진 량식공급소 직원인 한명학은 장춘에서 마약을 팔다가 잡혔는데 용케 탈출에 성공, 지금은 행방불명이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명학이 그 사람 얼마나 마음이 고왔게. 구차하게 살다보면 돈에 흑심이 아이 생길 사람 없나봐. 어찌 됐거나 사람 하나 버린게지. >>

로인협회 회장집에서 로인들을 취재할 때 누군가 개탄하는 소리였다. 화제는 꼬리를 물고 민국시기의 약담배로 치달아올라갔다.

당시 두만강연안에서는 흔히 약담배라고 일컬으는 아편재배가 성행했다고 한다. 당시 아편시장은 무한정 넓었고 호적이나 지주나 돈냥이 있는 사람은 아편을 태워야 행세를 할 정도였다.

<<밭뙈기를 부치는 사람치고 약담배 안심는 사람은 병신이였디오. 정보당 30냥이나 50냥씩 현물세를 내고 약담배를 재배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해도 너무 했디. 어느핸가에는 삼도구(지금의 화룡)에서 중국사람이 현물세 받으러 온걸 최승권툰장의 충동질로 마을사람들이 때려 죽였디 않았갔시오. 그래서리 순관들이 나와 조사를 합데다. 툰장하고 사람이 좀 모자란 오삼학이 붙잡혀 갔는데 나중에 오삼학이 죄를 몽땅 뒤집어 썼디오. 툰장 말이 내가 나가서 빼줄테니 네가 했다고 하라고 해서 거짓으로 불게 한겁네다. 툰장 최승권은 억울하게 죽은 오삼학의 명까지 합쳐 지지리도 오래 살다가 갔디오. …>>

현송원로인의 말이였다.

만주국이 되면서 약담배는 금물이 되였다. 간혹 깊은 산속에 양귀비가 피였지만 일단 발각되면 수갑 차고 감옥 밥깨나 축내야 했다. 하지만 일제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항일유격근거지에서는 대량으로 양귀비를 심었다. 약담배를 팔아 무기와 량식을 마련하기도 했고 막부득이한 경우 자살용으로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만주사변후 흩어져 산속에 들어가 국군으로 행세하거나 토비로 된 원 동북군 잔여부대의 장교들은 태반이 약담배쟁이들이였다. 그들과 손잡고 싸우는데는 약담배가 기운을 냈다.

건국후에도 약담배재배는 얼마간 계속되였다. 1952년 일어난 실화라는 점을 루루이 강조한 숭성진 고성리촌 마준영(70세) 로인의 회고담은 몸서리가 쳐질만큼 끔찍했다. 마약이 곧 돈이라는 집념은 사람들을 돌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돈에 환장하면 못하는 일이 없소. 그게 52년도 봄이였나 기래오. 기차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경찰들이 짐수색을 합데. 내 맞은쪽이 한 삼십대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앉았는데 경찰이 오더니 다짜고짜 아이를 보자고 합데. 아마 누가 미리 고자질을 했는디…단통 아낙의 얼굴색이 까맣게 죽더구만. 아이머리에 씌운 모자를 벗기고 멜빵 통바지를 벗기니까 배가죽을 실로 기워맨것이 보였다니. 아이를 죽여서 아편을 나르는 주머니로 쓴 셈이디. 기차가 조양천역에 멎자 경찰들이 계집을 수갑채워 끌고 갑데. 그 계집 요절났을게라. >>

리국록(63세)씨는 지난 1952년 아편장사 심부름을 했는데 성공은커녕 아편을 뭉테기로 날렸다고 한다. 가방에 큰 덩어리 3개나 되는 아편을 넣고 룡정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가 한창 속력을 낼즈음 공안인원들이 차간 량쪽에서 검색을 하면서 조여왔다. 겁이 덜컹 나서 아편을 얼른 꺼내 보자기에 둘둘 말아 의자밑에 밀어넣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 몸만 빠져나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다.

마약밀매는 일종의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런만큼 모험을 않고는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숭선진 옥석촌의 김석권은 아편장사에 문리가 튼 사람이였다. 사람이 체대가 크고 담력도 있어 언제나 단신으로 장사를 했다. 곁다리가 없으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액수도 컸다. 반면에 그만치 위험부담도 컸다. 그번에 그는 주머니를 해단 헝겊에 손바닥만한 아편 네덩어리를 넣고 탄띠처럼 배허벅에 두르고 간편한 몸으로 길을 떠났다. 조양천에서 하루밤 자고 장춘행기차를 타려고 어슬녘에 기차역으로 가던 그는 등뒤로 칼을 맞고 모험으로 충만된 인생을 종말지었다. 뛰는 놈우에 나는 놈 있다고 살인자는 칼손 한번 휘두르는것으로 위험천만한 밀수의 로고를 덜었던것이다.

밀수국법을 무시한 이 범죄의 행로를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달린 때는 1992년 겨울부터 시작된 자동차밀수였다고 하겠다. 산간벽지 외진 마을, 광복때 쏘련군이 타고 온 찌프차 앞머리에 여물을 수북하게 갖다놓았다는 어릴적의 한토막 이야기를 평생 자랑처럼 되뇌이며 기차는커녕 자가용은 더욱 구경도 못하고 살아온 로인들이 살기도 하는 마을이 하이야 밀수기지로 되였다. 밀수군들이 떨어뜨린 떡고물 얻어먹던 한때를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난단다.

<<하루에도 이 길로 매미차(승용차가 매미가 나무에 붙어있는것처럼 땅에 납작 엎드린다고 해서 생긴 말)들이 수십대씩 지나갔수다. 동네가 벅적들 했지비. 그때 마을사람들은 떼목을 묶어 매미차를 실어오는 일을 했수다. 하루저녁 나가 어슬렁대면 4~5백원은 벌었다 이겁네다. >>

조선변경의 공지에는 하이야가 줄지어있었다. 일본 도요다가 한대에 3~4천딸라, 일단 그것이 강을 건너오면 값이 껑충 뛰였다. 외국땅에서 실컷 굴러다니다 목숨만 간당간당 붙어들어온 중고차가 중국에서 과분한 대접을 받았던것이다.

자동차밀수가 성행하면서 딸라 씀씀이가 커져서 중국 각지의 딸라가 연변으로 모였다. 국정가격 1딸라에 8. 27원인데 암시장가격은 12원까지 오른적도 있다. 그리고 자동차밀수가 주로 두만강연안에서 이루어지기때문에 음식업자와 려관업자들이 이사가는데 강아지 따라가듯 강역으로 옮겨갔다. 해괴한 바람이 산좋고 물맑은 강가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을 휘저어놓은 꼴이 되였다. 그래서 로인들은 달라진 세상을 한탄하기가 일쑤다. 룡정시 백금향 백금촌의 박길남(68세)로인도 그런 한분이였다.

<<광복전에도 백금향에 료리간들이 있긴 했디. 강건너 회령과 무산에는 제법 고운 기생들이 욱실거리고…우리 동네 박아무개는 생강장사로 돈을 버니까 기생놀이에 빠져버렸디. 한번은 생강을 사서 배 한척에 골똑 싣고 가서 받은 돈을 몽땅 리화자라는 기생 밑에 바쳤다 이거야. 그런데 기생년이 돈 떨어지니끼리 박아무개를 내쫓아버렸디. 박씨가 쫓겨나오는 마당에 기생더러 옷을 한번 벗으라 하고 간청하고는 시 한수를 지었다고 기래요. >>

그 시는 대강 이런 내용이였다.

멀리서 보면 죽은 말의 눈이요

가까이서 보면 상처가 깊구나

더구나 이도 없는 짧은 입인데

생강 한배를 다 삼켰구나

박씨는 돈은 다 날렸을지라도 풍치가 있는 한량이였던 모양이다. 기생사타구니에 빠지면 박씨처럼 패가망신은 자명한 일, 한달동안 강역에서 기생질을 하여 번 돈으로 자동차를 밀수해서 타고 갔다는 녀자들이 연길에서 그 차로 택시업을 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동차밀수가 밀물처럼 닥쳐왔다가 썰물처럼 물러간 뒤로 음식점이며 려관이며 가라OK에서 웃음을 팔고 노래 팔고 몸을 팔던 아가씨들도 부른듯 다 가서 흥성대던 마을이 아늑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듯싶었다. 하지만 마을의 풍토가 뒤바뀌여졌다. 심부름만 해도 목돈을 벌던것을 생각해서 청년들 안목에서 푼전벌이는 도외시되고 농사일에 마음을 안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녀들은 밀수차가 달려간 길로 마을을 떠나고 지어 젊은 각시들도 젖가슴에서 애기를 떼두고 갔다.

밀수차의 고동소리에 산천의 고요는 깨뜨러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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