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명절기간 섣불리 발길 재촉… 살인추위에 죽다 살아나
우리민족 설 풍속 자취 감추고 한족 풍습인 폭죽소리만 요란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영하 20도의 추위를 뚫고 목단강의 상징인 소수민족영웅상 앞에 선 서규정(왼쪽) 조성래 시인.
한겨울 만주 여행에서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영하 이십 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뿐이다. 애초 우리가 여행을 계획한 것도 그 추위를 맛보기 위해서이다. 기왕이면 그쪽의 설(春節) 풍속도 맛볼 겸해서 시골 벽촌 김일량 시인의 집에서 설을 나기로 한 것이었다. 만주 벽촌이니까 아직 우리의 옛 풍속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설 풍속이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한족의 풍습인 요란한 폭죽 소리만 마을 여기저기서 그믐밤을 지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속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제사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진작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규정 시인의 재촉도 있었지만 더 이상 벽촌에서 추위에 갇혀 구들장만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겨 목단강으로 떠났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돈화를 거쳐 만주에서 가장 크다는 경박호 호수 옆을 지나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끝없는 눈길을 달려갔다. 목단강, 중국말로 '무딴짱'에 도착하니 벌써 해는 떨어지고 초저녁이었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지만 표준시가 한국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데다가 위도 상으로 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저녁이 일찍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름만 낯익고 모든 것이 낯선 목단강에 내리자마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우리를 맞아 준 것은 영하 이십 도가 넘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그것은 마치 부산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정어리들이 목단강 얼음판 위로 내동댕이쳐진 형국이었다. 같은 온도라도 초저녁 무렵의 추위가 훨씬 춥게 느껴진다. 눈가에 물기마저 얼어붙는 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고, 턱이 얼어붙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춘절기간이라 상점들마저 문을 닫아 도시는 가로등불빛만 그 매서운 추위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예상치 못한 추위에 노출된 우리들은 일단 어디든 추위를 피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스크에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어 이미 거의 동태가 다 되어버린 서규정, 조성래 두 시인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떻게 해보라고 명색이 여행 가이드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은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가게라도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면서 전화를 걸든지 길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블록을 돌고 돌아도 도무지 문을 연 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턱이 얼어 입을 열기도 힘이 드는지 얼어 죽겠다는 두 사람의 우는 소리마저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렇찮아도 당초 명절기간에 움직인다는 것은 힘들다는 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앞당기자고 보챈 것은 그들이었기에 노골적으로 투정을 부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더 동태처럼 언 목단강 거리를 추위와 허기에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기진맥진해진 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출입이 있는 상점을 발견했다. 그곳이 어떤 곳이건 기어들어갈 작정이었다. 그곳은 마침 백화점 식품 코너였다. 우선 얼었던 눈자위가 풀리면서 시야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턱이 녹으면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냉동된 물고기가 따스한 물에 녹아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의 표정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우리는 한동안 냉동된 상태로 모든 의식이 정지되어 버린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 같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우리는 그곳에서 빵과 음료수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러나 전화 걸 곳이 없어 다시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목단강에는 우리를 안내해 줄 시인이 있었다. 급하게 떠나오는 바람에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고, 도착해서 어떻게 해 볼 요량이었는데 그것이 결국 어려움을 자초한 샘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적으로 만주의 추위를 확실하게 맛볼 수는 있었다.

뒤에 마음씨 고운 아가씨의 도움으로 전화를 했지만 명절이어선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호텔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하마터면 목단강에서 동태가 된 채 영원한 얼음 미라가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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