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생각하면 보통 ‘만만디(慢慢的)’라는 말이 쉽게 떠오른다. ‘느리게, 천천히’ 그런 뜻이다. 마치 게으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필자는 좀 생각을 달리하고 싶다. 중국 도시 곳곳이 발전하고 있는 양상은 우리나라가 한창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의 그 모습보다 빠르며 다이나믹하다. 이는 물론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보다 더 강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북한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인 독재 국가인 북한이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식량문제조차 해결하고 있지 못한 현실과 비교할 때 반드시 강한 정권이 경제 발전을 시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잘사는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중국 국민들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곧 해야 할 때는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만들어진 이후의 달콤함은 어린아이가 입에 문 사탕의 달콤함을 느끼는 것 보다 더 달콤한 느낌일 것이다.

‘중국’을 생각하면 보통 ‘만만디(慢慢的)’라는 말이 쉽게 떠오른다. ‘느리게, 천천히’ 그런 뜻이다. 마치 게으름을 연상시킨다.

필자가 운영하는 가게에는 조선족 직원과 한족 직원이 있다. 대체로 조선족 직원의 업무성취도가 높은 편이다. 한족 직원들은 조선족 직원에 비해 이해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결과의 만족도가 낮은 편이다. 조선족 직원들은 한족직원들을 직접적인 경쟁상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재미있는 상황이 관찰된다.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제한적인 상황이라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처음 숙소를 임대해서 직원들이 거처를 시작했을 당시였는데 당장 숙소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대청소를 지시했었다. 필자는 당연히 스스로가 기거해야 하는 곳인 만큼 알아서 깨끗이 청소를 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우리 한국식 개념이라면 잠자고 생활하는 곳의 청결은 건강과 직결된다는 생각 때문에 최소한 정리정돈과 쓸고 닦고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게 종업원들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었었던 같다. 겨우 청소라고 해 놓은 것이 거실의 소파 자리 잡고 화장실 청소하고 대충 쓰레기 치운 것이 전부였다. 나중에 왜 쓸고 닦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빗자루하고 걸레가 없어서 그랬다고 말을 했다. 어처구니없는 반응 아닌가? 당연히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가게에 있는 청소도구를 가져가서라도 청소를 해야 할 것이며 돈을 달라고 해서 청소도구를 또 구입하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빨리 청소를 마무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런 상황은 과연 ‘만만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게으름’ 때문일까. 이들이 알고 있는 경험과 학습이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 하에서 할 수 있는 이 정도가 최대가 아닐까? 즉 우리 눈에는 게으름이라 보이는 것이 이들 자체의 생활문화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과 알아도 안하는 것의 차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세밀히 구분할 수 있다면 진정한 ‘만만디’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토바이 뒷바퀴 펑크를 수리하는 장면이다. 타이어 하나 바꿔 끼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규격이 맞는 타이어 가져오는데 한시간, 타이어 분리하는 장비가 없어 빌려오는데 한 시간, 장비 다룰 줄 몰라 한 시간. 아침 9시 반 쯤 수리하러 가서 점심 때 끝났으니 답답함의 극치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해 가면서 살아남는 법을 치열하게 배워왔던 우리의 사고방식은 무한한 창의력과 극도의 개인경쟁력을 갖추게 했고 그로 인해 우수한 한국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한 반면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해야 할 이유나 개인경쟁력을 갖추지 않아도 그다지 삶(그냥 사는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조선족 직원들은 좀 달랐다. 최소한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대응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대책 없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뭔가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찾기 어려워 할 수 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만디’라고 표현하며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반복되는 경험과 학습으로 깨어지고 있다. 또한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되는 것에는 절대로 만만디가 없다. 특히 외상값을 받으러 오는 가스 배달 중국 아저씨를 볼 때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오전에 전화주문하면 오후에나 배달을 하던 사람이 돈 받으러 오라면 10분도 되지 않아서 달려온다. 뭐 하기야 돈 준다면 늦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만만디’와 ‘빨리빨리’의 절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중국에서 택시를 타보면 그 느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과거에 중국은 자전거의 천국이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자전거를 길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경제적인 발전이 가속되면서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도로의 자동차를 볼 때면 미래 중국은 세계 최대 오염국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중국을 다녀본 사람들은 잘 알고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이지만 교통질서와 양보가 거의 없다. 마치 계몽되기 전 우리나라의 교통 상황을 보는 것 같다. 빈 택시가 뒤에 따라오던 차들이 밀리던 말든 간에 길 한복판에서 손님을 태우는 느긋한(?) 장면이나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면서 아슬아슬 지나가는 승용차들의 이기적인 모습은 몇 번이나 사고를 당할 위기를 넘기면서 필자가 직접 경험한 상황들이다. 뭐가 그리 바쁠까? 또 보통 약속시간을 한 두 시간 어기는 것이 다반사인 사람들이 내가 운전하면서 다른 차에게 양보 좀 할라치면 왜 빨리 가지 않느냐며 성화를 부린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목청 높여 싸우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금은 드물기는 하지만 운전자들 끼리 길거리에서 서로 욕하고 싸움질하는 모습을 우리나라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내가 경험한 중국에서는 운전자들끼리 삿대질하고 욕하며 차 세워놓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여튼 중국의 운전자들은 사람보다 차가 먼저고 신호등과는 무관하게 빨리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국인들의 운전습관은 매우 험하다. 신호위반은 물론이고 중앙선 침범도 다반사다. 그러나 종종 있는 자동차 사고의 경우 대형사고 보다는 접촉사고의 빈도가 높은 편이다. 그 이유는 자량의 성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과속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의 만만디 속에서 빨리 빨리를 본다. 덩치가 너무 커서 둔해 보이지만 바다 속에서는 멀고도 먼 거리를 빠른 속도로 헤엄치는 고래와 같은 모습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갖는 빠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리의 장점은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였다. 그래서 한국은 유명해 졌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여유와 신중함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빨리를 외치며 무너뜨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의 예를 교훈삼아 이제는 조금 늦어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길을 제대로 가는 현명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이 무서운 기세로 빨라지는 중국의 속도를 두려워 할 것 없이 가장 효과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보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이상원

한국창업정보전략연구소(www.bizdosa.com)소장

한중동방투자자문유한공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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