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김성진 선생이 보내온 글이다. 외래어를 정복한 경험담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편집부]

내가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인 대학교 2학년 시절 KBS 방송국에서 보내온 서울대학교의 "한국어" 교재를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이어서 한국 출판물을 접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자연히 서울대의 "한국어" 교재를 애지중지하게 되었고 그만큼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 후로 방송국에서 보내온 민중서림의 "국어사전"을 받아보게 되면서 한국어 공부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워낙 약간의 글 솜씨가 있던 터라 5개월 후에는 오리지널 한국어로 글을 지어 한국 매거진 "고국 소식"에 게재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원고료로 200달러 정도의 송금수표가 날아왔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의 송금은 미국 은행을 거쳐 중국으로 이체되는 실정이어서 수금 절차도 복잡했고 수수료 또한 만만치 않아서 결국 아쉬운 대로 수금을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외래어와 다이렉트로 부닥치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시절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패턴 메이킹 관련 한글 기술서적의 번역을 부탁 받으면서부터였다. 생전 처음 보는,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낱말들이 부지기수였고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서는 각 분야 전문용어로 외래어를 엄청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무슨 수로 한국어 공부의 최대장벽인 외래어를 정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게 되었고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한국 금성사에서 출판한 "국어대사전"을 입수하기에 이른다. 문학박사 이희승님이 편저하신 수록 어휘 50만의 거작임이 틀림없었지만 쇠털같이 많은 각 분야의 외래어를 해명하기엔 역시 역부족이었다.

"국어사전"만으로는 해결책이 아님을 절감하고 나니 어느 쪽으로 출구를 모색해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마침 국어대사전의 부록 부분에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컨텐츠가 첨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해당 트릭을 일일이 파고들게 되었고 표기관련 요령과 노하우를 하나하나 터득하게 되었다.

외래어 표기법을 마스터하고 나니 자연히 "英韓사전" 쪽으로 외래어 정복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영한사전과 외래어 표기법을 결부시키면 외래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껑충 뛰어넘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인맥을 동원해서 민중서림의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한사전은 발음순이 아닌 영어 자모순으로 소팅되어 있어서 외래어의 원어를 찾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궁여지책으로 영문 자모와 국제음성기호와의 대칭관계를 리스트로 뽑아 보기도 하고 표기법에 준해서 영한사전의 낱말마다 수성펜으로 한글을 표기해 보기도 했지만 이처럼 아둔한 방법을 쓰다가는 어느 세월에 외래어라는 산을 넘을까 싶었다.

"발음순, 즉 국제음성기호 순으로 만든 영한사전이 있었으면 오죽 좋으랴"는 생각이 불같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과욕이었을 뿐 국내외 출판물 시장을 이 잡듯이 뒤져도 도저히 발굴할 길이 없었다. 아니 아직 상재(上梓) 자체가 아니 된 것 같았다.

몇 개월이 지나서 수록 어휘 5만여 정도의 외래어사전이 시중에 출시되기도 했지만 확인 결과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각국의 인명, 지명, 작품명 등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나면 알짜배기 외래어의 수효는 극히 한정되어 있어서 그 역시 각 분야의 외래어를 두루 해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래어 오버컴의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두 손을 놓고 있는 와중에 세월은 사막의 모래처럼 감쪽같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글 익히고 글 짓는 공부만은 게을리하지 않아서 중국 내 한글 잡지와 중국어 잡지에 몇 편의 글을 게재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에 동분서주하면서도 외래어 테임의 숙제를 염념불망하는 나날이 반복되기를 어언 17년, 작년 여름의 햇볕이 따가운 어느 날 오후 푸른 나무가 우거진 시내 공원의 한복판에서 런웨이 위를 조깅하던 필자의 뇌리 속에 불꽃처럼 스치는 인스퍼레이션이 있었으니 "정규표현으로 영어 낱말과 국제음성기호의 위치를 일괄치환 해주는 작업을 하다 보면 발음순 영어 사전을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그길로 조깅을 마감하고 자택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프로그램과 승강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새벽 3시까지 컴퓨터 작업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개월 심혈을 기울인 끝에 수록 어휘 15만 개 정도의 발음순 영어사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발음이 표기된 영어 단일어만 추려서 만든 사전이다 보니 단일어로 구성된 복합어까지 감안하면 수십만, 수백만 개에 이르는 외래어 사전을 만들어 낸 셈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각 분야 전문 용어의 경우 대부분이 영어 복합어로 구성된 외래어였다.

실험 삼아 바이오테크, 환경산업, 기계공학, 레포츠 등 각 분야 전문 용어 중 랜덤으로 임의의 외래어를 추출해서 원어를 찾아보았는데 기막히게 적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통했다.

이 사전을 만들어낸 후로부터는 한국 뉴스를 봐도, 한글 매거진을 읽어도, 각 분야 전문 서적을 읽어도 해결 못 할 외래어가 거의 없어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외래어를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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