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도교

천도교는 시천교, 청림교, 대종교, 유교 및 원종교와 함께 조선인민족종교이다. 천도교는 동학당의 후신이다. 창교주 최제우(도호 수원선생)가 교도를 선포한 것이 1860 년이다. 제4대 교주 손병희(孙秉熙)가 이용구 등 친일파를 개출하고 1905년 12월 《천도교》라 이름을 고쳤다. 천도교는 하늘을 숭상하지만 인간성과 인심을 떠난 하늘은 없으며 하늘은 오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인정하였다.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고 인산사이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것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천하에 덕을 닦고 백성을 많이 도와주어 지상천국을 세워 모든 동포가 한데 뭉쳐야 한다는 《개량세계주의》를 주장해왔다. 천도교의 의식은 간편하고 소박한바 물 한사발만을 제공한다. 물이 천지만물을 대표한다고 보고 있었다.

천도교는 1907년을 전후하여 만주조선인 중에서 전파되었다. 1908년 천도교는 국자가에 한명(韩明)의숙을 세웠고 1913년 8월 백사원(白士元), 고상률(高尚律)이 용정에 교회당을 세웠고 이듬해 3월 최진오(崔振五) 등 7명이 용정 천도교종리원을 세웠다. 1916년전후, 반일사상을 선전하는 것을 주요한 수단으로 동흥학교 등 교회학교를 육속 일떠세웠다. 1917년 9월 간도엔 천도교 교도 460여 명이 있었다. 1919년에는 3.13 반일 시위에 참가하였고 후엔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1921년 4월, 천도교는 용정에 동흥중학교와 부속소학교를 창건했다. 1922년 3월, 동흥제1소학교, 이듬해 10월에는 동흥제2소학교를 세웠다. 1928년 5월 천도교는 8개 학교, 935명 학생을 갖고 있었다.

9.18사변후 천도교는 최림을 위수로 하는 신파와 박영호를 위수로 하는 구파로 갈라졌다. 신파는 친일파로 전락되었다. 구파는 천도교의 진의는 민족독립에 있으며 조선을 《천도국화》한 나라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 통계에 따르면 통화, 신빈, 안동, 집안, 장백, 연길, 투도구, 도문, 배초구, 할빈, 수분하, 치치할 등 지역에 종리원 또는 종리소가 20개 소, 신도 2119명이 있었다. 그 외에 봉성, 관전과 환인 등 지역에도 상당수의 신도가 있었으나 그들은 구파로서 주요하게는 반일활동에 주력했다.

동변도 각 지역의 천도교신도들은 9.18후 량세봉의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투쟁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함경남도 도정 박인진은 김일성을 만남 뒤 그의 제의를 접수하고 조국광복회에 가입하였으며 신도들을 인도하여 항일투쟁을 성원해 나섰다. 1937년 이후 장백유격근거지가 파괴되고 1938년 박인호 등이 일제에게 검속되자 천도교의 교세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1936년 6월말 현재, 만주에는 천도교 교회당 14개, 신도 2085명이 있었다. 이들은 투도구와 도문에 집중되었고 통화, 안동에 250명 신도가 있었다. 그 뒤 천도교는 점차 사라졌다.

4. 시천교

1907년 이용구(李容九)등 친일파들이 원 동학교에서 쫓겨난 뒤 천도교와 맞서 시천교를 창설했으며 서울의 일진회(一进会) 본부에서는 이희진(李熙真)을 파견하여 간도 지부장직을 이어 받게 했다. 1908년 8월 용정 등 지역에 시천교지회를 세우고 사립학교를 꾸렸다. 최초에는 교도 1만여 명에 13개 학교까지 갖고 있었으나 친일경향을 보아낸 뒤 교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1911년 5월 용정교회당에 화재가 인 뒤 시천교는 곤경에 빠졌 다. 1917년 간도에는 33개 교회당, 342호 신도가 있었다.

1920년 일제의 세력을 빌어 교세를 확장하였다. 1922년 동정(东征)학교를 세우고 1924년 6월 동아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친일종교였기에 그 세력은 여전히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 1936년 6월말 만주에 9개 교회당, 891명 신도가 있었는데 전부 간도에 집중되었다. 1945년 8.15 해방 후에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5.청림교

청림교는 동학교에서 분리되여 나온 신흥교파로서 교주 남정(南正)이 1913년에 창설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섭취하여 창립되였는데 유심주의에 속하는 실제를 탈리한 자아수도이다. 청림교가 신봉하는《大悟道之原理》는 유교, 불교, 도교를 합치면 《무극》이라 한다고 한다. 무극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속에 있으며 선천적인 것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이 유쾌하면 《무극》으로 되고 극락세계에 닿을 수 있다. 신도들은 념불을 외우고 예배를 드리고 마음을 수련한다. 이래야만 《만사지(万事知)》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면《무위이화(无为而化)》가 되고 무위이화면 무극 즉 극락세계에 닿게 되여 성인이 될 수 있다.

청림교는 20세기 10년대에 간도의 용정과 토산자(화룡현)일대에서 전파되었다. 간도 주교 림갑석(林甲石)이 전도했다. 3.13반일시위에 많은 청림교도들이 참가했으며 교주 남정이 죽은 뒤 한병수(韓秉洙) 등이 청림교를 친일의 길에 몰아넣었다.

1925년 청림교는 재차 반일경향을 띠여 주요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그해 6월말 용정에는 청림교교회 하나, 교도 30여 명밖에 없었다.

1935년 청림교의 남홍광(南洪光) 등이 의연활동을 벌려 그해 12월에 용정 북산에 영막전(永幕殿)을 세워 교도들은 달마다 향을 지피고 예배를 하였다. 1936년에는 조선의 선조들을 기념하는 륙태묘(六太廟)를 지었다. 1942년 3월, 귀석비(龜石碑) 14개를 수건하고 7개월이나 향불을 지피며 예배를 드렸다. 1942년 3월 반일사상이 있는 조선인들이 적극 교회에 참가하여 연길, 화룡 두개 현에만 교도 1000여 명이 있었다. 1944년 용정에서 《청림교사건》이 일어났다。 (다음절에서 서술) 1946년 림창세(林昌世) 등은 비석을 세우고 청림교전도활동을 회복했다. 이듬해 림창세가 국외로 떠나자 청림교도 사라졌다.


6. 대종교

대종교는 조선인의 시조 단군을 신봉하는 까닭에 단군교라고도 이른다.

사람에게 《세 가지 진실(三真)》, 《세 가지 맹동(三忘)》, 《세 가지 로정(三途)》이 있는데 성인은 그것을 《느끼고(感止)》, 《조절하고(调息)》, 《건드리지 않으면서 (禁触)》 한마음으로 참되게 행사하여 이상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이 대종교의 주장이다.

1910년 라철(罗哲)이 대종교를 창립하였고 1911년 전후 당군교의 이정완(李贞完)이 화룡현 학성촌 등 지역에서 전도했다. 1913년 10월, 심권(沈权), 박태익(朴泰益)이 왕청현 춘명향 류수구에서 암한묵(严汉默)의 집을 임시전도사로 삼고 전도했다. 1914년 라철이 총본사를 조선으로부터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청파호(현 화룡진 하동)에 옮겨와 반일활동에 종사했다. 당시 신도는 1만 5000여 명이다.

1915년 일제는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공포하고 탄압했다. 1916년 9월 라철이 조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하고 김교헌(金教宪)이 제2세교주로 되었다.

1918년 4월 김교헌은 서일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대종교 교도를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하여 반일운동을 벌렸다. 그해 8월 중광단을 토대로 《정의단》을 조직했으며 12월에는《북로군정서》로 고치였다. 서일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이 총사령을 맡았으며 이장녕이 총참모장을 맡았다. 1923년 김교헌이 피로에 지쳐 세상을 떳고 윤세복이 제3세 교주에 취임했다. 1925년 일제와 군벌정부의 탄압으로 하여 《금교》가 되었다. 윤세복은 《순종교활동》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포교》신청을 내여 허가를 얻었다. 1928년 대종교 총본사는 밀산현 당벽진으로 옮겨가 반일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1936년 동경성에 《대종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에게 교의학습을 시켰다. 1936년 이후 또다시 흥세하였다.

1942년 11월 녕안에서 신안진으로 가는 대종교 교주 윤세복과 이동주가 일제에 체포된 뒤 녕안, 목릉, 밀산, 연길, 반석, 할빈, 돈화 등 광범한 지역에서 대종교의 20명 골간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10명은 목단강 감옥에서 학살당했고 10명은 《8.15》와 함께 출옥되었다. 즉 《대종교 임오교변》이다. 그 후 대종교는 지하로 들어가고 신도들은 흩어져 포교활동이 중지되었다.


7. 원종교

1912년 김중건(金仲建)은 조선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사상을 섭취하여 《천기대경(天机大经)》, 《도경(道经)》, 《대종원부경(大宗元符经)》등 저서를 펴내여 원종교(元宗教)의 원리를 창립했다. 이듬해 1월 1일 원종교의 창건을 전격 선고했다.

원종교는 《주역》중의 천극설과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극원(极元)철학》사상을 제창하면서 《대공화무국(大共和无国)》의 《대동세계(大同世界)》를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1914년 봄, 김중건은 원종교 신자 2명을 거느리고 훈춘 현성 밖의 신풍촌에서 선교했다. 이듬해 1915년 안도현의 도전동(道田洞)에서 건원학원을 꾸리고 원종교의 교리를 강의했다. 1918년 장백현 왕가동(王歌洞)에서《왕가학원》을 꾸리고 민족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했다. 1920년 김중건은 다시 훈춘지방에로 돌아와 《원종총사》, 《대진단》의 명의로 반일에 종사했다. 1923년 6월 원종교는 화룡현 삼도구 원화동, 청두구, 수평동, 복동 등 지역에서 전도했으며 교도가 90여 명에 달했다. 1925년 6월 원종교는 5개 교회에 272명 교도를 갖고 있었다. 동시에 《신붕(新风)》잡지를 간행했다.

원종교는 학교를 꾸리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22년 6월에 연길현 동흥동에 경신학교를 세웠고 8월에 로은평에 원성학교를, 이듬해 10월에는 연길현 상의향 세린하에 애영학교를 세웠다. 1926년 3월, 평강 개척리에 현신학원과 원녀학교를 세웠고 신포 (申跑)를 교장으로 농대학원을 세웠으며 그해 10월에는 정림동에 인일학교를 세웠다. 1928년 5월현재 원종교는 7개 학교에 298명 학생을 두었다.

1928년 봄, 김중건은 일제의 제한과 반종교충격에 못 이겨 흑룡강 녕안현 이도하자에 전이하여 계속 활동했다. 1931년 김중건은 《조선혁명군》지도처를 설립하고 무기를 사들여 반일무장투쟁준비사업을 다그쳤다. 1933년 3월 김중건은 뜻밖에 암살되었다. 그 후 원종교는 점차 사라졌다.


8. 유교

유가사상은 기원전 1세기에 조선에 전해졌으며 기나긴 시일을 거쳐 하나의 종교- 유교로 되었다. 조선 이씨왕조시기에는 국교로 되었다. 20세기 초, 조선인유교인사들은 간도 각 지역에 사숙을 꾸리고 청소년들에게 《사서오경》을 가르치고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유교는 《수신, 제가, 치국, 태평》설을 주장하면서 《지선》을 설교하였다. 인간관계에서는 《5륜》을 도덕규범으로 삼고 있었다.

1912년 1월 차의범(车义范) 등은 국자가에 연길공교회를 세웠다. 1913년 100여 명 유교인사들이 개산툰에서 《간도공교회》를 내왔으며 북경공교당회의 분회로 되었다. 당시 공교회회원은 3000여 명이었다. 1916년 8월 연길공교회는 국자가 동쪽에 공자묘를 지었다. 1919년 3.13운동 후 이범윤이 유림인사들을 위주로 《광복단》을 조직해 반일무장투쟁을 벌렸다.

1920년 이후 유교회는 여러 개 파로 갈라졌다. 림창세는 청림교에서 갈라져나와 용정촌에 대성유교파의 용정문묘회(文庙会)를 세웠고 그해에 대성중학교와 그 산하에 소학부를 꾸리였다. 1929년 12월, 이창환 등 10여 명이 용정촌에 대성원 동만총지원 (大圣院东满总支社)을 꾸리였다. 1925년 전후, 공교회는 신, 구파로 나눠졌다. 1926년 4월 신파는 연길에서 《대동학원》을 꾸리고 옛 서숙을 개혁하고 신학을 보급했다. 그해 9월 공교회는 해산령을 받았고 1930년 6월 다시 회복되었다. 1933년 9월, 용정 문묘회와 대성원 동만총지원은 합병하여 대성원동만총지회를 내왔다. 1936년 6월, 만주의 조선인유교신자는 1만 5450명이며 전부가 간도지역에 모여 있었다. 1941년 유교는 연길에 《왕도서원》을 꾸리여 삼강오강사상과 충군애국사상을 크게 설교했다. 1944년 현재 간도에는 문묘 7개, 신도는 1만 명이 안 되었다. 해방 후 유교는 종교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공맹지도의 영향은 깊었다.


9. 불교

불교는 조선인 중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신앙이 소극적이고 신도들이 심산유곡의 절당에만 국한되여 있으므로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인 욕망을 갖고 있고 또 그것을 추구하기에 인생은 자고로부터 고달픔이 가득차 있다. 생명의 연장, 즉 이승에서 저승에로의 전환은 곧 고달픔의 계속이라고 간주한다.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도를 닦아 불교의 이치를 깨닫는 《원각 (圆觉)》과 《원적(圆寂)》의 길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무욕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야 고난이 끝난다고 여긴다.

1911년 3월 조선인 승려 김본연(金本然)이 용정촌에서 최기남(崔基南)의 협찬으로 운흥사(云兴寺)를 지었다. 사에 불상 3존을 모셨다. 당시 신도는 200여 호에 달했다.

1915년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반어사(梵鱼寺)의 고승 김구산(金龟山)이 간도에서 참법(忏法)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를 주지승(主持僧)으로 모셨으나 절은 그냥 흥성하지 못하였다.

1920년 7월 화룡현 월청 룡암동에서 조선인 승려 최승한(崔承韩)이 구리불상 하나를 발견하고 신흥사를 지었다. 1925년 4월 근처에 다시 별원을 증축했고 1928년에는 인수사(仁寿寺)로 개명했다. 그해 8월 물에 절이 밀려갔고 1931년에 새롭게 건축됐다. 1923년에 부암촌(현 용정시 팔도향 경내)에 용주사(龙珠寺)를 세웠다. 1924년 간도에는 6개 절당과 2424명 신도가 있었다.

1931년, 도문 등 지역에 불교부인회가 세워졌으며 금연, 금주 등 운동을 벌려 세력을 얼마간 확장했다. 1936년 6월말 현재 만주에는 23개 불교 절당, 3899명 신도가 있었다. 봉천, 금주, 안동 등 지역에 개별적으로 신도가 700명 있는 외 나머지는 간도에 집중되었다. 불교는 남만, 북만에서 큰 발전이 없었다. 1944년 10월, 조선인불교신도는 4578명이었다. 1946년 3월, 간도의 조선인불교절간이 31개에 달했으며 《동북연변불교협회》가 나왔다. 그 대표인물로는 연길시의 김천해씨였다. 1947년 토지개혁 후 불교는 종적을 감추었다.


10. 싸만교

싸만교는 간도의 조선인, 만족들 속에서 널리 잔파 되고 영향을 끼쳤던 종교의 하나 이다. 영혼숭배를 주요내용으로 하며 세상 만물은 모두 영혼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무당(巫堂))을 인류세계와 영혼세계를 이어놓는 중개자로 보고 있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담당하며 남자일 경우 《프크쓰)라 부른다. 신령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면 무당을 청하여 의식을 가진다. 의식이 끝난 후 제물을 무당에게 보수로 준다. 싸만교는 고정적인 지점, 신조, 신도가 없지만 사람들은 무당을 찾아 도움을 바란다.

조선인가운데서 싸만교는 매우 큰 영향을 일으켰다. 후에 통치계급이 유교를 제창하였기에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해방될 때까지 싸만교는 홀시할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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