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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가 삼림렬차에서 내릴 때에는 늦은 오후였다. 려객이라야 창호를 내놓고 토끼털 귀막이를 건 젊은이 한사람이였다. 역사는 여전히 열사람이 들어서면 설자리가 좁을 자그마한 단층집이였다. 다만 전에는 초가였지만 언제 지었는지 지금은 기와를 얹고있었다. 역에는 여전히 플래트홈이 없었다. 역사의 마당에 세멘트로 만든, 따구쟈라고 쓴 간판이 찌부러진채 창호에게 현실감을 강조하려는듯 서있었다. 역 창문으로 머리가 희끗한 로인의 머리가 피끗 보였다. 창호는 따구쟈로 가는 사람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리고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역사에 들어가려고 걸음을 옴겼다. 역사앞마당에 입가에 성에를 가득 문 흰점박이 고동색 말이 말발구를 끌고 서있었다. 함께 내린 젊은 사람은 누구를 기다리는지 두리번거리고있었다.

창호가 역사에 들어가려는데 문을 열리며 털모자를 꾹 눌러쓰고 팔짱을 낀 겨드랑에 말채찍을 낀 사내가 나왔다. 사내는 문밖에 사람이 있는것을 몰랐는지 창호를 보고 엉거주춤했다.

<<어!...>>

창호를 보는 사내의 눈이 빛나고있었다. 창호도 이곳이면 알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었기에 누구일가고 기억을 더듬고있었다. 그러나 기억에 나는 사람은 아니였다. 그 사내의 눈길이 창호를 알아보고있음이 력연했다. 그러나 창호는 누구던지 도저히 기억이 없었다. 사람을 많이 접촉하는 도시사람보다 적게 접촉하는 시골사람들이 더 오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저 혹시 렴... 창호?...>>

사내는 알아보고있었다.

<<저, 그런데요... 누군지?...>>

사내는 머리에 눌러썼던 털모자를 확 벗었다.

<<그래, 나 첫눈에 알아봤다니까. 창호지?... 나 주로우따야! 몰라?..>>

기억이 났다. 따구쟈의 <<맨발의사>>인 주쩔뚝이, 주제이량의 아들 주하이청이였다. 맏아들이고 성미가 괄괄해서 언제나 주로우따라고 불렀다.

창호는 주로우따를 아래우로 훝어보았다.

<<이름을 대니까 그렇지 길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하겠어. 잘 있었어?...>>

주로우따가 반갑다고 장갑을 낀 손으로 창호를 툭툭 건드렸다.

<<글쎄, 그렇다고 했지. 내 눈은 못속인다니까. 역시 시내사람들이야. 이전의 그모양이야. 늙지를 않았어. 나야 늙었으니까 알아볼수가 있나... 하, 자, 가만...>>

주로우따는 한쪽에 서있는 젊은이를 불렀다.

<<내 아들이라구.>>

주로우따의 아들이 인사를 했다. 그러자 주로우따가 창호의 가방을 들어 말발구에 올려놓았다.

<<앉어. 아들놈 마중 왔다가 귀한 손님마중을 했구나. 꿈자리가 좋더니...>>

주로우따는 모는 말발구는 사두마차 한대가 다닐만한 길을 따라 미끌어가기 시작했다. 하향했을 때 기억을 더듬어 옷을 많이 입고와서 추운감은 없었다. 오후의 해가 산등성이를 올라타려고 서둘고있었다.

눈길이라 말발구는 소리없이 잘도 달렸다. 점박이 고동색 말이 잔걸음으로 뛰면서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하향시절 창호는 사두마차를 몰다가 번진적이 있었다. 그때의 당황함이란...

해가 산등성이에 올라탔을 때 말발구는 마을에 들어서고있었다. 창호의 가슴에서 카이란이 점점 무겁게 다가오고있었다.

마을은 저녁을 짓는 연기속에 잠겨있었다. 통나무로 된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여오르고 나무가 타는 묵직한 향기가 마을의 공기속에 잠겨있었다. 동북식 삼간초가들이 많았지만 붉은 기와를 얹은 기와집들도 보였다. 창호가 있을 때에는 기와집이라고는 한채도 없었다. 벽촌 오지 시골이라도 변화는 하고있는것이였다. 참나무 울바자들은 여전하였고 개들이 컹컹 짖는 소리도 옛날과 같았다.

주로우따를 만난 이상 창호는 당연히 주로우따네 집 손님이 되였다. 주로우따의 안해는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옛날 이곳에 하향을 했던 사람이라는 말에 무척 반가운 기색을 지었다. 인사가 끝나자 바람이 일듯 부엌으로 나가 가마를 가시고 채를 썰고 법석을 떨었다.

창호는 동북 한족들의 길다란 캉(구들)에 다리를 드리우고 앉았다. 주로우따가 말발구를 풀고 말을 마구간에 넣고 들어왔다. 검정솜옷에 조이짚이 묻어있었다.

<<반갑다 마다, 우리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어. 일흔살을 넘겼으니 잘 사신거지. 때때로 창호를 외우군 하셨는데... 생전이면 무척 반가와하셨을거야...>>

주로우따는 구들에서 나무로 된 담배통을 창호에게 내밀었다.

<<어때, 우리 따구쟈 토담배 기억하고있지? 한대 피워봐... 근데말이야, 저녁에 누구를 청하면 좋을가? 이렇게 왔는데 한번 잔치를 벌려야지. 생각나는 사람은 다 부르라구. 지금은 먹는건 많으니까 사람 부르는것 무섭지 않다구. 옛날 굶을 때와는 달라...>>

창호는 기억에 생생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한청꾸이, 리푸룽, 마커린... 하다가 목구멍에서 카이란의 오빠 이름 레이밍호우 하는것을 눌러버렸다.

<<됐어. 이러다 우리 주로우따 가산 털게 생겼어. 다른 사람은 천천히 찾아볼게...>>

주로우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창호에게 말했다.

<<괜찮다니까. 집에 돼지고기도 있고 전번에 옥노에 걸린 노루고기도 얼려둔것이 있어. 먹을건 근심 말라구. 그리고 술도 얼마든지 있어. 창호 알지? 그 한라이피말이야. 성분이 부농이라고 자꾸 투쟁을 맞던 그 령감쟁이말이야. 그 령감의 아들 한소징있잖아. 그자식이 지금 술을 고으고있어. 옥수수가 많으니까 그걸로 술을 만들어 파는데 수입도 짭짤하대. 그 한라이피 령감쟁이한테서 전수받은 기술이라나... 제기, 지금은 기술이 있어도 돈이라니까...>>

주로우따의 아들이 창호가 부른 사람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주로따네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창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온 집안이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서로 문안을 하고 소식을 묻고 도시의 형세를 묻고, 말 그대로 야단에다 법석이였다. 술상이 차려졌다. 사람이 많아 구들에 한상하고도 봉당에도 한상을 차렸다.

술잔들이 오가고 건배를 소리지르고, 술이 거나하게 되자 화쵄(동북 한족들 사이에서 류행하는 손으로 하는 벌주놀이)이 시작이 되였다. 그러는 사이 카이란의 소식을 알고싶다는 창호의 마음은 어느새 요란스러운 술상의 기분에 눌리워버렸다.

늦게까지 마신 옥수수술때문이였는지 창호는 이튿날 아침 주로우따가 깨워서야 일어났다.

<<창호, 일어나. 누가 왔어...>>

창호는 늦잠을 잤다는것을 의식하고 이불속에서 일어났다.

<<누가? 누가 찾아?>>

<<창호, 아우, 나요...>>

봉당에 오십대초반의 사람이 서있었다. 둥그스럼한 얼굴에 긴 코마루, 고집스러워보였으나 사람을 보는 눈은 온후했다. 카이란의 오빠였다!

<<아니, 어떻게?!...>>

창호는 카이란의 오빠가 찾으리라고는 예산하지 않고있었다. 이제 불편스러움을 감내하면서 찾아가리라 생각했던 창호였다.

<<어떻게 알고...>>

카이란의 오빠 레이밍호우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실은 어제 저녁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소. 찾아올가 하다가... 아침 식사준비를 했으니 가서 식사나 하자구...>>

창호는 카이란의 오빠가 찾아왔다는것,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청하러 왔다는것. 그것으로 소년들처럼 설레이고있었다.

<<잠간요, 세수나 하구요...>>

세수를 하면서 창호는 카이란의 소식을 알수 있을가 하는 기대감으로 차있었다. 이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서로의 소식이 지금까지 끊어졌다고는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카이란은 어디에 있을가? 재혼을 해서 살고있는것이 아닐가?...

카이란은 오누이 형제였다. 아버지는 광복전 산동의 기민으로 동북에 피난을 온 사람이였다. 따구쟈에 정착을 하게 된것은 따구쟈에 사촌이 먼저 와 발을 붙이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여기 동북의 흑토지에서 광복을 맞았고 최후로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결심을 했다. 그러나 안해가 카이란을 낳고 일년이 안되여 이곳의 지방병인 흑산병으로 누런 물을 토하고 죽었다. 그후 카이란의 아버지는 재취를 하지 않았고 오누이를 키우며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도 되면서 살았다. 그랬기에 그때 젖먹이였던 카이란을 동냥젖으로 키우다보니 고생은 가히 상상할만했다. 따라서 카이란은 아버지의 장상명주(掌上明珠)였다.

레이밍호우의 집은 새로 지은 동북식 삼간집이였으나 기와는 얹지 않고있었다. 널직했으나 정리가 되지 않았고 잡동사니들이 가득 널려있었다. 마당 앞 남쪽에는 울바자를 의지하고 가쯘하게 팬 장작을 키넘게 쌓아놓았고 정원의 해당나무밑에는 밀짚이 쌓여있었다. 나무문을 열고 집안의 부엌에 들어서니 쏸차이(동북사람들의 겨울 배추절임. 소금에 절구지 않고 통배추를 더운물에 데쳐서 절임)의 시큼한 냄새가 났다. 부엌앞에 웅숭그리고 있던 늙은 개가 낯선 사람이 들어서는것을 보고 일어나 경계의 눈으로 창호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짖지는 않았다.

방안의 구들우에는 네모상에 밥상이 차려져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집안정리를 했는지 가벼운 먼지냄새가 장작타는 냄새와 섞이여있었다. 봉당중앙에는 작은 대가 만들어져있었고 대우에는 네모난 화로가 놓여있었다. 금방 불을 떠놓았는지 참나무숫이 이글거리고있었고 집안은 그 열기로 하여 후끈했다. 레이밍호우의 안해, 카이란의 형수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창호동생이 왔다니까 자네 레이형은 안절부절을 못하더라구요. 앉어요... 시내서는 뭐가 많겠지만 시골이라서 차린것이 없어요. 어서 구들에 올라가요...>>

카이란의 오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창호를 자리에 권했다.

<<구들에 올라가지. 자, 어서 시장하겠는데...>>

상에는 료리가 네접시 차려져있었다. 창호는 구들에 올라가 앉으며 레이밍호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것을 잊었다는것을 생각했다.

<<이렇게 초대해주어 감사합니다.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레이밍호우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런 이야기하지 말게. 아우가 그러면 우린 더 황송하네. 준비하느라고 했지만 차린건 없네. 전번에 함정에 걸린 메돼지를 잡았는데 맛이나 보라고 청한거요. 도시에서는 야생 메돼지고기는 구경하기 힘들거라 생각하고...>>

<<그렇습니까? 도시에서 메돼지고야 맘대로 먹을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이렇게 다시 따구쟈로 오니 고향에 온 기분입니다. 형 감사합니다. 잊지 않고 계셔서...>>

상을 마주하고 앉자 레이밍호우가 작은 사기술잔에 술을 따르고 말했다.

<<아우가 오니까 마음이 착잡해지는구만. 자, 한잔 들기오.>>

창호는 술잔을 들었다.

<<형의 초대를 받고보니 저도 어쩔바를 모르겠습니다. 일찍 찾아봐야는데 살기가 바쁘다보니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둘은 잔을 부딪치고 건배를 했다. 카이란의 형수가 들어와 술을 붓고 창호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료리를 집어주었다.

<<창호동생은 지금 뭘 하고있어요? 지금은 도시 살기가 정말로 좋아졌더라구요. 전번에 현에 가보니 거리에 차들이 꽉 차있더군요. 나 층집들을 보니까 그런 집에서 어떻게 사람이 사는가싶더라구요...>>

창호는 자기의 근황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카이란의 형수가 입을 짝 벌렸다.

<<그럼 동생은 이젠 로우반(사장)이 되였네!...>>

레이밍호우가 안해를 흘겼다.

<<로우반이 뭐야? 시내에서는 경리, 아니면 사장이라고 부른다구...>>

창호는 카이란에 대해 묻고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를 받은 이상 언제든지 카이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거라는 생각을 하고 솟아나는 물음을 참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상한데로만 빠지고있었다. 창호는 레이밍호우부부에게 술을 부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가부께서는 안보이시네요?>>

레이밍호우가 술잔을 들려다가 창호를 바라보았다. 대답이 인차 나오지 않았다. 창호는 인차 짐작을 했다.

<<죄송합니다... 인사라도 드리고싶었는데...>>

레이밍호우가 다시 술잔을 들고 말했다.

<<뭐, 먼저 한잔 마시오. 재작년에 돌아가셨소. 팔십을 념겼으니까 고래희지. 장수한 로인이라고 장례때 곡도 하지 말라더군. 취고수(吹鼓手)을 불러서 삼일장을 지냈소. 아마 따구쟈에서는 제일 장수한 로인이라 장례도 크게 치뤘소. 그런데...>>

레이밍호우는 그런데 하다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안주를 집어 창호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고인의 이야기는 그만하지. 자, 아우, 안주도 집고 술도 마시라구.>>

창호는 그런데의 뒤말이 무얼가고 생각하며 술잔을 들었다.

<<듭시다. 형도 많이 늙었군요.>>

<<오십이 넘었는데 늙지 않을수 없지. 나 손자까지 있다네.>>

<<그래요? 정말 할아버지네요?... 세월 가는건 막지 못하는구만요.>>

그리하여 화제는 과거로 갈듯 하다가 다시 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술이 몇순배 돌았다. 서먹하던 술상의 분위기도 많이 돌아섰다. 한동안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고 하향했을 때 이야기로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고있었다. 그러다가 레이밍호우가 갑자기 물었다.

<<아우, 한가지 물어도 되겠나?>>

<<묻다니요? 뭔데요?>>

레이밍호우가 한참동안 창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찾고있는듯싶었다.

<<뭔데요? 말씀하세요.>>

레이밍호우는 주저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우, 자네 우리 란이, 카이란 소식을 알고있소?>>

<<네?!...>>

창호는 아연해지고말았다. 이 먼길을 온것이, 그리고 그 수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아팠건것은 바로 카이란의 소식을 몰라서였고 그 소식을 알고저 여기 따구쟈로 온것이 아닌가?... 그랬다. 이번 따구쟈행을 결심할 때 카이란의 소식만을 알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믿었었다. 그런데 오히려 물으러 온 사람한데 묻기다니...

<<그럼 아직까지?!... 전 여기서 카이란의 소식을 알거라 생각하고있었는데요? 그럼...>>

레이밍호우는 실망으로 가득한 눈으로 창호를 바라보았다. 창호의 말속에서 거짓말이라도 찿고싶은듯 눈길 굳어있었다.

<<그때 창호가 그렇게 간후 란이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시집에서 나가버렸소. 그래서 산동에 있는 외가마을까지 찾가갔지만...>>

이 부분은 창호도 대충 들어서 알고있었다. 레이밍호우가 울먹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더는 소식이 없었소. 죽었는지 살았는지... 부친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년을 외우셨소. 그러며서 그때 창호아우한테 시집을 보내야는데 평생 한이 되였다고 후회를 하셨소... 그년 생각이 날 때마다 부친께서는 창호아우한테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하시며 락루하셨소. 한을 품고 가셨지...>>

레이밍호우는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자 머리를 숙였다. 상우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란이, 그년이... 그렇게 지독한 년인줄은...>>

창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런 소식은 아니였다. 막연하나마 어데선가 살아있을거라는, 그리고 지금쯤은 누구인가와 소식도 주고받으며 살고있으라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소식이라니? 그렇다면 카이란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있는것이기나 한것인가?

창호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길 없었다. 결과가 이럴줄 알았다면 따구쟈로 오지도 말았던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세상은 무얼 창호에게 주고싶었던것일가? 창호가 찾는것은 이제 과거뿐만은 아니였다. 카이란이 자기의 아이를 임신했다는것을 알았을 때 창호는 이미 하나의 결심을 굳히고있었다.

잔잔한 해빛이 숲을 덮고있었다. 눈빛의 반사광이 눈을 찔렀다. 창호는 레이밍호우의 뒤를 따라 눈길을 헤치고있었다. 딱딱구리가 나무를 쫒는 소리가 기관총소처럼 따르륵 울렸다. 한두점의 하얀 구름이 하늘을 날고 해빛은 언제나 없이 다감했다.

<<다 왔소. 여기오...>>

레밍후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란의 아버지 묘는 하얀 눈에 덮혀있었다. 남향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산소는 보기에도 정리가 잘되여있었고 자리도 잘 잡은것 같았다. 뾰족한 묘의 웃부분에 자그마한 돌이 놓여져있었고 해빛때문인지 돌우에는 눈이 없었다. 티없이 하얀 눈에 덮인 묘지는 마치 흰천을 둘러놓은듯 정갈했다.

창호와 레이밍은 제사를 지낼 자리에 눈을 쳐냈다. 그리고나서 가지고 간 음식과 과일을 차렸다. 그리고나서 량해를 구하듯 창호가 레이밍호우에게 말했다.

<<조선족식으로 절을 해도 되지요?>>

레이밍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가 조선족이니 조선족식으로 하는거야 당연하지. 부친께서 아시면 더 좋아하시겠는데...>>

창호는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창호의 마음은 그 아득히 사라져가는 과거와 그날들의 아픔때문에,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은 아픔의 련속때문에 울고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저도 죄많은 사람입니다... 이제 해마다 찾아와 인사를 드릴게요. 카이란을 대신해서요...>>

창호는 중국식으로 묘앞에다 황지(黃紙)를 태웠다. 종이가 타면서 불길이 날름거렸다. 한장한장의 황지를 불속에 던지며 창호는 산다는것이, 살아야 한다는것이 무엇일가고 생각했다. 마지막 한장의 황지를 불속에 넣고 창호는 레이밍호우에게로 돌아섰다.

<<조선족들은 제사를 지내고 꼭 석잔을 마십니다. 되겠지요?>>

레이밍호우가 당연하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석잔을 마시겠네. 법이 그렇다면 나도 따라야지...>>

창호는 술을 부어 한잔을 마시고 다시 부어서 레이밍호우에게 주었다. 레이밍호우는 술잔을 받아들고 마실듯 말듯 망설이더니 갑자기 묘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창호가 와서 술을 붓습니다! 이제 한을 푸십시오, 아버지!... 용서를 받으셨으니 이제 편히 가십시오. 란이가 하는 인사와 같으게 받으십시오... 아버지!...>>

레이밍호우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창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쏟아져내렸다. 이 외로운 령혼을 위하여, 다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상처를 입었던 평범한 령혼을 위하여 창호는 울고있었다. 과연 이 아픔과 그들이 받았던 상처들이 그네들에게는 숙명이였을것이며 숙명이라고 말해야 하는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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