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시대, 이해와 소통을 위한 현장기록 9]한 민족 다른 삶, 한국인과 조선족의 동상이몽

2008년 8월 8일.  제 29회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 식전 행사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엄청나게 동원된 사람들과 대규모의 다채로운 볼거리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날 이후 며칠동안 인터넷에는 중국에 대한 비난조의 탄성과 함께 조선족을 힐난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문제는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 자격으로 식전 행사에서 한복을 입고 ‘아리랑’ 등 한국의 민요를 배경음으로 부채춤과 장구춤을 선보였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몇 가지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그냥 사람 수로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으로 행사를 도배했다.……역시 대국답게 스케일이 컸다.……중국다운 행사였다. 그런데 중국의 소수민족이 나와서 춤추는 장면은……조선족이 우리나라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데, 왠지 우리나라가 중국에 속한 듯한 그 더러운 느낌……물론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라는 것은 알지만……조선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우리 동포? 아님 중국인?'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면 우리는 뭐냐? 한국의 전통 의복인 한복을 입고 춤추는 조선족은 한국인인가? 왜 남의 나라 옷을 입고……’

‘황당하다.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사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조선족 거주지가 중국의 자치구인 것은 이해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으면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라고 여기지 않겠나?‘

중국 국적의 유학생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중국인 유학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필자.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총인구의 0.169%를 차지하는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족’이라는 말에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에게 조선족은 생활고를 이기기 위해 남의 나라에 건너가 어렵게 살아 온 먼 친척뻘 되는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조선족은 한일강제합병을 반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조국으로부터 망명해 간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거나 적어도 독립투쟁과 연계된 사람들의 후손쯤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조선족은 마땅히 조국인 한국으로 귀환되어야 할 사람들로 여겨진다.

제삿날,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집안 이야기에는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갔다 해방 후에 연변으로 건너갔다는 얼굴 모를 할아버지며, 일본 놈한테 땅을 빼앗기고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만주로 떠났다는 큰할아버지의 당숙 되시는 분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집집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조상이 한둘 정도는 끼어 있기에, 한국인에게 조선족은 피를 나눈 방계 혈족이자 도와줘야 할 못 사는 친척이다. 조선족은 남이 아니라 피붙이인 것이다. 조선족에 대한 비난의 글들은 ‘우리’라고 하는 민족적 잠재의식과 ‘우리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단일민족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믿음을 내비친다.

한국 대학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 중에는 간간이 조선족 출신이 끼어 있다. 한국인 선생님들은 굳이 한족과 조선족을 구분하려 든다. 한족 유학생은 돈이 많아서 오고, 조선족 유학생들은 부모들이 가난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교육열이 높아서 온 것으로 지레 단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련된 한족 학생들은 부자집 자녀로, 차림새가 좋은 조선족 유학생들은 ‘고생하는 부모 생각도 안하고 속없이 겉멋만 든 학생’으로 쉽게 치부된다. 이런 식의 인상에 근거한 판단은 외모나 치장의 정도로 사람을 속단하는 우리네 방식일 뿐이지만 중국 국적의 유학생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흔히 한족은 소위 ‘있는 체’를 안하는 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족의 경우는 옷차림이나 집안 살림만 보아서는 그 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족은 ‘씀씀이가 적어야 부가 쌓인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절약정신이 상당히 투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족들은 조선족을 포함한 우리 민족들을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려는 겉치레 의식이 농후한 실속 없는 사람들로 폄하하기 일쑤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급료가 높은 한국 회사에 취직하기를 소망하면서도 부티 나는 우리네 복장이나 자동차, 집의 규모에는 크게 궤념치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 유학생 장해연 씨와 한가로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 때, 장해연 씨는 ‘어느 나라를 응원하느냐’라는 곤혹스런 질문 공세를 받고 놀랐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이 당연히 한국을 응원할 것이고, 마땅히 한국을 응원해야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족들은 자연스럽게 중국을 응원하고 있었고 중국의 올림픽 개최를 기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러시아가 얽히고설킨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조선족

   
▲같고도 다른 연변 한국어와 남한 한국어를 비교․대조하는 연구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장해연 씨.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대부분의 조선족 학생들은 중국어와 한국어 2개 국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통역과 번역일을 자주 하게 된다. 이중 언어 구사자로 각광을 받는 조선족 유학생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선족 유학생들은 한국에 유학 와서 서너 달만 지나면 연변식 한국 말투를 말끔히 씻고 남한 말투를 유창하게 내뱉는다. 언뜻 들으면 남한 말씨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한국인들이 눈치를 못 챌 정도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족 유학생들은 거침없이 통역에 나선다. 문제는 이 때 발생한다.

……교수님께서는 이미 대학생 시절에 동양의 정치 이론을 장악하셨습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후로는 서양의 정치 이론도 장악하셨습니다. 이로써 교수님께서는 동서양의 정치 이론을 모두 장악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수님께서는 현실 정치도 변변하십니다. 이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교수님의 오늘 특강은 우리들의 앞날에 큰 방조가 될 것입니다.

통역을 듣는 한국인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마주치거나 웃음 어린 뜨아한 얼굴을 발견하고나면 조선족 통역사들은 조선족 한국어와 남한 한국어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깊이 실감한다는 것이다. 서로 떨어져 지낸 세월만큼 언어가 달라진 것이다. 이중언어사용자로서 장해연 씨는 가끔 양쪽 언어, 그 어느 쪽도 완벽하게 통달하지 못했다는 부족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곧잘 스스럼없이 조선족의 연변식 한국어를 고쳐주곤 한다.

‘정치 이론은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섭렵하는 것이고요, 현실 정치는 변변한 것이 아니라 능하다고 해야 하고, 우리들의 앞날에는 방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큰 도움이 되어야죠.’

   
▲시어머니 그리고 동서와 함께 단란했던 한 때. 

장해연 씨는 같고도 다른 연변 한국어와 남한 한국어를 비교․대조하는 연구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어휘, 강세, 억양, 문법, 관용어 등 언어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차이는 비록 뿌리가 같더라도 저마다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의 모양이 다르듯 겪어 온 삶의 차이를 담아내고 있다.

그녀에게 한국 유학은 민족, 역사, 언어, 조상, 혈통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갖게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크게 의식하지도 못했던 조선어, 조선 역사, 조선 문화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는 것이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저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살았던 조선족으로서의 삶은 그야말로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일 뿐이었다. 밖으로 나와 자신이 살았던 곳을 살펴보니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 일본, 북한, 러시아가 얽히고설킨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 살던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정체성의 혼란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한국 가정에는 집집마다 족보가 자랑스럽게 보관되어 있다. 족보는 천 년의 역사를 거슬러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는 집안으로부터 조선조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몇 십대손이라는 집안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혈통에 대한 정리와 후손의 계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조선족 중에 이러한 족보를 가지고 있는 집안은 극히 드물다. 모택동에 의해 단행된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혹시 신분이 안 좋다는 꼬투리를 잡힐까봐 조선족들은 있던 족보마저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부모 세대는 먹고 살기만도 힘들다는 이유로 그들의 뿌리와 과거를 보존하는 데 소홀했다. 부모의 고생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난 자녀들은 조선족을 넘어 중국의 주류를 향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세대가 되었다.

"조선족 며느리들은 돈 생겼다 싶으면 도망가기 일쑤?"...지독한 편견과 오해

자녀 대에 이르러 조선족들은 미처 준비기간을 가질 새도 없이 시장경쟁사회에 휩쓸리면서 한편으로는 한족에 동화되어 중국인이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출신 이민자로 다른 나라에서의 정착을 모색하고 있다. 그들은 민족 정체성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고민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의 삶은 그저 중국이 가르쳐 주는 대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 안에서만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학 때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는 장해연 씨는 사슴 농장이 딸린 한 식당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한국 식당에서 가장 먼저 부딪쳤던 어려움은 낯선 주방 기구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다라이’, ‘스뎅 그릇’, ‘요지’, ‘싹싹이’, ‘후라이팬’, ‘씽크대’ 등. 한국인들은 조선족의 말을 대개 알아듣는 데 비해 조선족은 한국인과의 의사소통에서 먹통이 될 때가 많단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직진하면……, ‘시추에이션’이 어떻고……,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며……, ‘칼라링’을 뽑아……, ‘박스’채 옮겨다 놓으면……, ‘무드’ 잡는 폼이……, ‘스타일’이 달라도 한참 달라서……, ‘코드’가 서로 맞는 사람으로……, ‘오일’하고 섞어서 써야……등등.

식당 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가 되자 이번에는 같이 일하는 한국 아줌마들의 지나친 친절과 배려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은 예사이고 이쪽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까지 간섭하려드는 아줌마들 때문에 적잖이 속이 상했다는 것이다.

‘돈 벌려고 한국 왔지?’…… ‘조선족 며느리들은 돈 생겼다 싶으면 도망가기 일쑤라네.’……, ‘어이, 조선족 큰 애기, 이리 좀 와봐. 참한 총각 하나 소개해 줄게.’……, ‘그 총각이 뭐가 어때서 그래? 사지 멀쩡하겠다, 성실하겠다, 돈은 벌면 되는 거고, 심성 좋고 예의바르고, 좀 못 배워서 그렇지, 가방 끈 짧은 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야. 조선족 총각보다 백배는 낫지.’……, ‘내가 아가씨를 특별히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야.’ 등등.

오해와 불신 버리고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기를...

   
▲장해연 씨는 오해와 불신을 버리고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조선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못 사는 동포’라는 생각을 한다. 마치 한국에 얻어먹으러 온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국의 TV에 방송되는 조선족도 도시보다는 시골의 삶을, 있는 집보다는 궁핍한 집을 선별하여 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동포의 삶을 방송할 때와는 딴판인 것이다. 재미동포는 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거나, 가장 부유한 사람 위주로 방송을 탄다. 그에 비하면 조선족에 대한 방송은 사건사고이거나 하층민 중심이다.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선입견은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들은 한국에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보다는 안면몰수하고 돈을 벌어 하루빨리 한족에 융합하여 중국인으로 살 결심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같은 중국 국적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족에 대한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동포임을 앞세워 다가오는 한국인은 반가운 사람이기는커녕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한국인과 조선족의 갈등은 다방면에서 심화되고 있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마치 서로 다른 잣대로 서로를 재면서 서로 틀렸다고 우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해연 씨는 한국어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학자로, 연변과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해 본 직장인으로, 결혼해서 아내노릇을 하는 주부로,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자 학부모로서 한국인과 조선족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필 수 있었던 현장 체험자이기도 하다. 앞으로 펼쳐질 장해연 씨의 생생한 경험담은 양측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그녀의 소망대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버리고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글: 장미영(전주대 교수)

*장미영 교수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대학에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및 한국문화교육을 담당했다. 현재 전주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북여성연구회 회장, 문화원형콘텐츠연구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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