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기3

2006년, 여름. 연변, 용정. 나는 40대 초반의 조선족 농민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남성은 용정의 한 시골에서 병든 노부모를 모시고, 학교에 막 들어간 어린 딸과 함께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성실한 청년이라고 동네사람들은 칭찬했다.

하지만, 이 남성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고, 동네 사람들도 이 남성의 사정을 딱하게만 여기고 있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딸이 태어나자 말자, 부인은 “도망”가고, 부모님의 건강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농촌에서 농사만 짓고서는 비싼 물가와 커가는 딸의 학비를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 장가가지 않겠냐고.” 이 제안을 들었을 2004년 당시, 한국 내에도 조선족 불법체류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남성과 같이 한국에 연고가 없는 조선족들이 갈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한국의 풍요와 발전의 이미지에 매료되었던 조선족 동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바라던 결과, 갖가지 불법 이주 상품들이 변종을 거듭하며 브로커들을 타고, 확대 재생산되던 때였다.

이 농민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온 농민들이 도시 아파트로 이주하고 “때깔도” 달라지고, “말투”도 달라지는걸 보면서, 용정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는 미래를 준비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장갚를 가기로 결심을 하고 수속을 시작했다. 전주에 살고 있다던 소개받은 여성과 중간 브로커는 수수료 천만 원을 요구했다. 필요한 서류가 오고 가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어렵게 빚을 얻어 마련한, 첫 수수료 천만 원을 지불한 후, 이 여성과 브로커는 잠적했고, 그 가난한 용정 농부는 어렵게 마련한 돈을 “떼어 먹히고” 말았다.

한국여성들(또는 한국국적을 가진 여성들)이 “결혼장사” 또는 “국적장사”를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소문은 들었지만, 난 그 피해사례를 직접 목격하고 만 것이다. 이 남성은 한국에 가지도 못하고, 빚을 갚지도 못하고, 딸은 농촌의 조선학교들이 폐교하여,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다녀야 해서, 비용은 두배로 들고, 부모님 또한 병들고, 일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잠적한 “사기꾼” 브로커들을 찾아나서는 것도 어렵고, 공증된 서류들도 없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기도 만만치 않다. 왜, 그렇게 많은 조선족들은, 브로커의 정보와 인간성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면서도, 그 사기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행에 돈과 미래를 투자하는 것일까? 이 남성은 단지 운이 없었던 것일까?

이 남성과 같이, 조선족 동포들은, “소문”을 통해서 알았거나, 아는 사람이 통했던 브로커를 소개받아 비싼 “수수료”를 내면서 함께 노무송출의 과정을 준비한다.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불법 브로커에 의존한 결과, 한국행에 대한 절차나 과정은 “지식”이나 신빙성 있는 “자료”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누구는 어떻다더라” 라는 소문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행이 문제없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인 브로커를 만난다거나, 출입국사무소를 무사히 통과한다거나 하는 등 이주과정 절차상에서 “고도의 행운”이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운이 나빠서, 잘못된 제비를 뽑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20년간의 조선족 이주(노무송출)는 “소문”이 곧 지식이고, 법이 되어서,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수많은 층위의 공모된 브로커들에 의해서, 이주의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체계와 절차, 그리고 그 약속들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까지도 “지식화” 되어야 한다. 소문에 근거해서 또는 소개자의 인간적인 신뢰에 기댔던 조선족들은 수많은 배반을 목격해 오지 않았는가.

“소문”이 주는 막연한 희망과 행운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고 그 약속을 지켜가야 하는 것 아닐까.

중국동포타운 신문 연재 13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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