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목단강 편지'의 가락과 정서 '처녀 뱃사공'으로 이어져
'만주 간 님'이 '군인 간 오라비'로 대체
공통적인 '메나리조'가 노래의 맛 더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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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북쪽 언저리에서 발원해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목단강.
"목단강 가면 편지 하소…."

한 오 년 전인가. 만주 간다는 내게 박정애 시인은 그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참 정감이 갔다. 박 시인은 원래 부산말을 감칠맛 나게 하는 분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우선 '목단강'이란 지명이 서정적이다. 웬만한 시인이라면 이름 하나 가지고도 시 한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붙은 '편지'라니…. 아, 저 먼 두만강 건너, 그리고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목단강. 강가에 목단(모란)꽃이 많이 피어서 목단강일까, 아니면 강이 목단처럼 고와서일까…. 그 모란의 꽃잎을 강물에 띄우듯이 먼 남쪽 나라에 편지를 보낸다…. 생각만 해도 그림이 쫙~ 펼쳐진다.

일찍이 우리 부산의 빼어난 여성 가객 이영도도 목단(모란)을 노래했다.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도 아득한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 흩는다


우리가 엄동설한에도 굳이 목단강을 찾은 것은 목단강의 그러한 이미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대부분 시인들이 만주를 첫 방문할 때 목단강을 가고 싶어 하는 이유도 막연하지만 목단강이 갖는 그러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강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모란꽃….

하지만 막상 목단강에 가면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던 그러한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나는 목단강을 세 번이나 방문했다. 그것은 '목단강편지'란 노래때문이었다. 박 시인이 굳이 '목단강 가면 편지 하소'란 인사말을 건넨 것도 그 노래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1930~1940년대 '이화자'라는 비운의 가수가 불러 크게 유행했던 '목단강 편지'라는 노래가 있었고, 박 시인의 모친이 생전에 그 노래를 자주 불렀고, 또한 그 노래를 부르면서 과거 젊은 시절 살았던 목단강을 그리워했다고 했다. 당시 서울에서 목단강까지 가는 기차 노선이 있었다. 대륙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서 그 그리움은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한 번 읽고 단념하고 두 번 읽고 맹세했소.

목단강 건너가며 보내주신 이 사연을

낸들 어이 모르오리 성공하소서….


1950년대 히트한 '처녀 뱃사공'과 곡이 흡사하다. 가만히 음미해 보면 가락뿐이 아니라 내용도 무척 닮았다. 홀어머니 모시고 군인 간 오라비를 기다리며 굳건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처녀 뱃사공과 거의 같은 곡조다.

'목단강' 이미지는 '낙동강'으로 '만주 간 님'은 '군인 간 오라비'로 '나의 어려운 처지와 꿋꿋함'은 '처녀 뱃사공'으로 대체된 것이다. 게다가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민요의 특징이라는 메나리조가 노래의 맛을 더한다. '목단강 건너 가--며--'와 '낙동강 강바--람--에' 소리를 꺾고 떠는 것이 메나리 가락의 특징이다. 목단강 또한 지역적으로 만주이지만 함경도와 맞대어 있는 동만주에 위치해 있는 것도 노래 탄생의 우연은 아닐 성 싶다. 이 노래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암울한 시대에 '금과 은'의 리메이크로 다시 한편 크게 히트했다. 그것은 아마 노래 속에 담긴 '어려운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의지'라는 정신적 위안과 강과 처녀가 갖는 여성적이고도 낭만적 이미지에 정서적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낙동강을 끼고 이웃하는 함안군과 의령군 사이에 때 아닌 '처녀뱃사공' 원조논란이 일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2000년 함안군에서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세웠는데 최근에 와서 그 원조가 의령군이라며 의령 쪽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서로가 그 노래의 배경과 사연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표절이고 패러디이며, 진정한 원조는 목단강이며 진정으로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그 노래와 인연을 끊게 한 험한 시대(時代)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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