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2월12일 화요일
연출: 김경희 작가: 김경순
진행: 이소연, 전춘화


▶ 편지사연 1. <황혼의 보금자리> (여, 70대) 12/12 화

현애옥, 중국 길림성 연길시

나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다. 유수와도 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덧 젊은 세월을 추억 속에 파묻어 놓고 황혼의 문턱을 넘어섰다. 나이가 들수록 복잡한 시내가 싫어지고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어진다. 그러던 몇 년 전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모아산 정상에 올랐다.

추억의 독립운동을 연상시키고 사과배 고향으로 소문난 용정의 새로운 모습과 날마다 발전하고 있는 연길의 황홀한 정경이 한눈에 안겨 온다. 사면팔방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가 가관인데 나도 모르게 야호 ~ 하고 환성이 터져 나온다. 모아산 아래 굽이를 바라보니 대지의 젖줄기이런듯 만물의 소생에 단비되어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 연변의 옥토로 손색없는 동성용벌의 기름진 논밭들, 해마다 아름다운 봄을 단장시켜 주는 사과배 꽃들이 만발하는 무아지경의 들판들, 저 멀리 바라보이는 세라벌을 감싸 안은 듯한 낙타등 같은 첩첩산중의 산봉우리들.

아~이것이 정녕 나의 동년 시절부터 우리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풍수 좋고 살기 좋은 고장이 아닌가, 여기가 바로 내가 꿈꾸던 곳이었다. 간절한 꿈은 언제나 실현되듯이 얼마 후 우연하게 바로 해란강 뒷켠에 아담하게 지어진 빠리궁관을 찾아오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12년 전에 내가 여행하며 다녀왔던 프랑스 파리의 한 모퉁이를 연상케 하는 아담한 농촌 마을에 자리잡은 아파트였다.

용산촌 변두리에 줄지어진 엘리베이터식 5~6층집 소구역. 그야말로 황혼기에 들어선 그 누구에게나 욕심나는 보금자리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갈망했던 곳이라 보자마자 이곳에 와서 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나는 30여 년간 정들어 살아왔던 연길 시내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왔다. 기분 좋게 운전하며 지켜보니 모아산까지 삼 분 거리이고 용정과 연길까지는 십 분 거리이다.

용산의 뒷동산은 지구 보호구역이어서 일목일초도 보호되어 있는 훌륭한 산소공장을 방불케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실컷 마실 수 있는 청신한 공기가 하루의 에너지를 더해주고 저녁마다 해란강변을 거닐면 시원한 강바람에 더위를 식힐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근년에는 인근에 큰 병원들이 줄 지어졌고 여러 가지 상업 청사들이 들어섰으며 개업을 앞두고 있다. 멀지 않아 자연과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존된 아름다운 신도시로 거듭날 것 같다. 내가 선택한 황혼의 보금자리에서나의 황혼 인생을 산천초목과 동반하고 저 하늘을 날아예는 새들을 바라보며 집 앞을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것에 감사해 하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가고 싶다.


▶ 편지사연 2. <메주의 향기> (여, 10대) 12/12

최금혜,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 초중2

해마다 연말이 되면 엄마는 메주할 준비를 하신다. 콩도 고르고 가마도 준비하고 등 많은 일들을 하신다. 메주를 하려면 간단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처음에는 다 고른 콩들을 몽땅 큰 가마 안에 넣고 잘 익게 삶아야 한다. 다른 집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할머니와 엄마는 익은 콩들을 봉지 안에 넣고서 발로 골고루 밟는다.

봉지를 여는 그 순간, 구수한 콩냄새가 공기 속에 확산된다. 마지막으로 산봉우리와 비슷한 된장메주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고추장메주는 타원형 모양을 빚은 후 중간에 구멍을 뚫는다. 금방 만들어진 메주들은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향기롭고 귀여웠다. 메주들은 혹은 천정에 매달리고 혹은 주방 한구석 벼짚 위에 놓여진다. 첫 며칠은 콩냄새가 아직도 조금 남아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메주가 연한 갈색으로 변했고 콩냄새 대신에 조금 역겨운 냄새가 났다. 노랗고 반듯하던 얼굴이 마르며 금이 갔다.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다. 주방으로 가다가 친밀하게 한줄씩 앉아있는 메주들을 또 보았다. 이때면 메주는 색이 찐한 갈색으로 되었고 냄새는 매우 역겹다.

(최금혜) 엄마, 왜 밖에 가서 장을 사지 않고 집에서 직접 메주를 만들고 장을 해요? 힘들고 또 그 역겨운 냄새도 맡아야 하는데…

(엄마) 밖에서 산 장은 메주를 잘 숙성시키지 않아서 맛이 없는 거야. 집에서 메주를

자기절로 해야 진짜맛을 내지.

수많은 주름과 상처들이 늘어가고 있는 메주 자기의 본신 모양도 잃었다. 하지만 긴 세월에 많은 일들을 겪고 또 많은 일을 하며 속은 숙성되였다. 처음의 그 구수한 콩냄새로부터 역겨운 냄새, 그 예쁜 색깔로부터 찐한 갈색, 그 반듯한 얼굴로부터 터실터실 갈라진 얼굴로 되면서 메주는 숙성되여 갔다 벌레가 나비로 되려면 고통스러운 기나긴 탈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 향기롭고 더 독특한 자기만의 향기를 가지려면 낡고 쓸모없는 것을 썩혀버려야 한다.

메주의 향기는 긴 세월을 이겨낸 숙성의 향기다. 바야흐로 새 사물의 탄성을 의미하는 세월의 찬가이다. 나는 한모금 숨을 들이 쉬었다. 그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 속의 향기는 나더러 다시 한번 메주의 인생에 감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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