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응모글

 

응모글 제7편 황은실 <새벽에 온 문자> 심사평

서옥란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코로나 시기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간결하게 보여줘 

 

이번 공모전에서 가장 짧은 글로 간주될 만큼 간결성과 동시에 빠른 절주감을 보여준 글이다. 늦은 저녁에 도착하는 “딩동!”“딩동!”하는 다급한 문자음으로 시작하여 긴박감으로 독자들의 흡인력을 끌고 있다. 저자가 이 문장을 쓴 2022년 봄은 한국과 미국의 코로나 형세가 아주 준엄한 시기였다.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사촌동생이 연락이 닿지 않자 모두 긴장한 상태다. 코로나에 걸린건지 아니면 다른 사고가 난 것인지? 하루라도 연락이 닿지 않으면 서로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시기이다. 코로나라는 전례없는 전염병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가족과 친인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한층 깊어지게 했다. 이런 비상시기에 혹시나 확진되어서 큰 고생을 할까봐 모두 불안과 걱정에 떨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방역의 차이로 인하여 “중국은 아직도 군데군데에서 튀여나오는 확진자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대신 미국의 경우 “마스크 거부는 물론, 거리 지키기도 유지되지 않는” 등 차이때문에 더욱 불안한 상황이고,  “더구나 황색피부를 가진 동양인에 대해 배척하고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동생이 큰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간접적으로 코로나시기 외국생활에서의 어려움이 더욱 심각해짐을 표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서부터 다시 새벽에 잠이 들기까지 짧은 문자소동사건을 다루면서 코로나 시기,정부의 올바른 정책이 얼마나 중요하며 가족의 따뜻한 사랑은 이런 힘든 시기를 이겨나갈 수 있는 든든한울타리가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편폭이 짧은 원인도 있겠지만, 가족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좀 더 깊이있게 다뤄주지 못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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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글 제7편 새벽에 온 문자 (황은실)◀

 

응모글 제8편 남철우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심사평 

리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이 글은 취업난이 심한 뉴질랜드에서 작자의 성실한 노력과 아이디어로 한국인 사장이 설립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중화권 사람들을 포섭하고 “중국신문에 광고”까지 내서 더 많은 손님들을 유치해 회사의 “일등공신”이 된 등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제목을 보면 너무 기대가 되는 글이다. 남서태평양에 위치해있는 섬나라, 청정지역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그곳”에서 “그때” 과연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독자들은 너무 궁금해할 것 같다.  

이렇게 글에서 제목을 잘 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제목은 독자가 제일 처음 접하는 것이기에 내용에 어울리면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가 있어야 한다. 

“뉴질랜드에서의 그때”라는 제목은 사건이 벌어질 장소와 시간을 명시해주고 있다. 사뭇 호기심을 유발하며 이 글을 빨리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유혹하고 있다. 

혹, “뉴질랜드”를 가보지 않은 독자들은 뉴질랜드의 인문풍토를 알고싶어할 것이요, 또 작자가 뉴질랜드에서 “그때”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굼해할 것이다. 다시말해 “낯설고 물설은 뉴질랜드에 가서 작자가 어떻게 생활의 어려움과 실패를 이겨내고 외국생활에 적응하면서 성공, 또는 실패를 했고 희열, 또는 고뇌를 가졌을까? 혹은 기상천외의 일을 겪었을까? 혹은 뉴질랜드의 어떤 인문풍토에 반해 인상 깊은 유람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글을 읽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작자는 제목을 매력적으로 달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단 이상 글의 구성은 “뉴질랜드”에서 “그때” 벌어진 이야기로 짜여져야 할 것이다. “그때”란 시간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시간상의 어떤 점이나 부분”을 가리킨다. 반드시 뉴질랜드에서 있은 일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한편의 짧은 수기에서 이것저것 보는데로, 느낀데로 쓸 수가 없다. 작자가 보여주려는 주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구성이 그러해야 할 것이다.  

글은 특정한 “원리”에 따라 구성요소를 배열하는데 특별한 사건의 유형들인 행위, 장면, 전환점, 플롯(구성)의 역전 등으로 구성이 된다. 이것을 슈제트라고 한다. 즉 한편의 글은 체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글의 슈제트 구성의 특점은 작자가 소제목을 달아 독자들로 하여금 글의 본문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짐작하게 짠 것이다. 이런 소제목은 독서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글의 핵심을 전달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고 있다.  

글의 소제목을 살펴보자. “(서두), 뉴질랜드로 출국, 뉴질랜드의 취업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서양인들의 예절문화, 사투리의 에피소드, 가족을 그리는 회포, 비약적으로 변모된 고향 모습” 등 순(順)이다. 

소제목을 보면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해 할 것 같다. 서두와 결말을 빼고 거기서 “서양인의 예절문화”와 “사투리의 에피소드”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 뉴질랜드에 돈 벌러 간 외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 글은 서두와 결말 부분을 포함해 견문(见闻)을 이것저것 다 썼다는 말이 된다. 즉 글의 재료들이 어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취사선택이 된 것이 아니고 출국할 때, 귀국해서, 또 거기 가서도 주제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생각나는데로 소제목을 달아 쓰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수기는 결코 견문(见闻)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뜻깊은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는 당연히 “뉴질래의 취업난”과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등이어야 할 것 같다. 거기서 겪은 내용들을 좀 더 발굴해서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이 글은 좀 더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고, 무게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점이 제일 아쉽다. 

그래도 다행히 이 글은 조리정연하게 글을 엮어내려가서 읽는데 별로 부담이 없었다. 가끔 가다 생활에서 겪은 안타까운 심리에 대한 묘사와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대한 대화묘사를 통해 문장의 깊이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은 많이 칭찬을 해주고 싶다. 

예를 들면 이국타향에서 취업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그 안타까움을 “기숙사 유리창에 퍼붓는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광경으로 하여금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폭우의 요란한 울림소리와 함께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한바탕 울었다.”라는 묘사나, 또 자동차 정비공장에 취직하러 가서는 사장님이 며칠 후에 소식을 주겠다고 하자 “기다리라는 말은 아예 안된다는 말보다 못하였다.”라고 안타깝고 절박한 심리를 보여준 점 등이다.  

연변친구의 사투도 너무 재미있게 묘사했다. “저녁에 몇시에 쌰발 함둥? 요기 옆에 중국식당에 같이 가서 초우채에다가 피주 한잔 합시다.”라는 대화묘사는 인물의 출신과 성격을 아주 생동하게 그려주고 있다.  

앞으로 슈제트 구성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하면서 열심히 글쓰기를 하면 작자에게서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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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글 제8편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남철우)◀

 

응모글 제9편 조려화 <내 친구들에게> 심사평

전은주 문학평론가,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

 

“멀리 창밖으로 스멀스멀 봄이 오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삶의 행복이 무엇일까 하고 자문한다. 그 행복을 커피 한 잔의 여유와 친구들과의 우정으로 회상한다. 

그는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베란다에서 화분의 꽃들과 눈맞춤하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행복감이 들 때, ‘불현듯’ 친구들과의 우정을 떠올린다. 그들과의 우정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는 30년 전, 외국의 직공숙사에서 ‘운명처럼’ 친구 셋과 만난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을 넘는 세월동안 두터운 우정을 쌓아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 주고,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쉼터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폭풍우를 막아주는 항구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들은 사회 초년생들이 겪는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련애상담도 하고, 색다른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청춘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각기 짝을 만나 헤어진다. 한 친구는 낯선 도시 청도로 가서 힘들게 자리잡았고, 또 한 친구는 일본에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힘들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친구는 고향에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고, 필자는 배우자의 배신으로 리혼하고 쫓기듯 한국으로 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끈끈한 우정을 이어갔다. 누군가는 녀자들이 질투와 시샘이 많아 그 우정이 얄팍하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6년 전에 청도에 있는 친구네 집에 모여 꿈같이 행복한 해후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글에다 인생이란 살고 보면 비록 보잘 것 없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친구 셋이 있다는 것만은 당당히 내세울 수 있다고 한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함께 려행도 하고, 퇴직하면 맛 좋은 은식도 함께 먹으러 가고 아프면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던 그 약속은 지금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게 행복해 진다고 한다.

이 요약처럼 필자는 자신이 느끼는 삶의 작은 행복과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한 기억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아주 유려하고도 세밀한 글솜씨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독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행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마다, 조건마다 다 다르다. 물론 필자가 말한 이 행복은 그 자신에게는 ‘소중한 보석’일 것이다. 그것을 행복으로 기억하는 한,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필자가 말하는 행복에 대해, 또 그가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그 행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불안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행복을 표현하고 있지만 필자가 의도하지 않은 행복 이외의 것도 생각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필자가 이 글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그 우정 또한 자신을 늘 행복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이런 질문을 함께 갖게 해 준다. 

우리 자신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가? 한번 느낀 그 행복이 영원한 한 것인가? 행복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짧은 기억이라는 이불이 기나긴 인생의 고통을 잠시 덮어주는 게 아닌가? 

가끔 모호한 문장이 더러 보인다. 이를테면 “녀자는 나이가 들면서 남성호르몬이 많아진다더니 나는 호르몬이 과다분비 되는건지 시도 때도 없이 감성이 폭발한다” 는 문장은 문맥의 흐름상 남성호르문이 과다분비 된다는 것처럼 읽힌다. 독자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전후 맥락을 따져서 조금 더 섬세하게 작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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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글 제9편 내 친구들에게 (조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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