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응모글

 

응모글 제22편 김경희 <나는 조선어문 교원이다> 심사평

서옥란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산재지역에서 우리 말과 글을 꽃피우다

수기가 정서적 고양과 큰 울림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진실성과 동시에 문학적 속성을 일부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글쓴이의 감수성과 그것을 이야기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30여 년의 교직생활 경험을 이야기에 담아 진정성 있게 담아내고 있으며 조선어문 교사로서의 자신의 소박하면서도 굳건한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꾸준한 노력과 변함없는 리상을 가지고 민족의 교육사업에 무한히 헌신한 일이 얼마나 보람있고 빛나는 일이였는지 잘 엮어내고 있다.

 

19살 꽃나이에 시골 조선어문 교원으로서 여러가지 역경에 부딪쳤을 때 저자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변함없는 신념이였다. “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선 것이 곧바로 조선말 교육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고 순종시키겠다는 결심이였다.” 이와 함께 애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해낸다. “단지 조선어문의 교사만이 아닌 력사, 생활풍속과 전통 등 민속문화까지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넣었더니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저자의 교수방법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와 실천을 보여준다. 저자는 학생들의 글짓기 수준제고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기부터 동시, 동요까지 지도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아이들의 심리적 변화를 파악해 고민을 해결해 주고 그들과 심리적 소통까지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랑송, 랑독대회 등 실천적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여러가지 상을 수여받고 애들의 자신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시대적 특색이 있는 다양한 교수방법을 개척함으로써 조선어문 교사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이어가는 실천가로 활약한 것이다.

 

사랑과 열정이 없이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저자는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천직”이라고 한다.  “꽃이 우리 민족의 얼로서의 우리 글과 우리 말이라면 나는 달가이꽃을 떠이는 줄기가 되고 꽃을 지키는 가시가 되리! ”저자는 꽃과 줄기와의 관계라는 예술적 표현을 통해 남은 평생을 계속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 땅의 교육현장에서 몸 담고 있는 평범한 교원의 평범하지 않는 삶을 통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어문 교사의 의지와 집념을 낱말 마다에서 쏟아내고 있다.

 

 이 글은 교육의 현장성을 중심으로 과감한 실천의지와 보람된 성과들을 진술하는데 의욕을 보이면서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하지만 민족학교의 교사, 특히 조선어문 교사로서 인재양성에서 여러가지 오류와 시행착오, 아픔과 좌절을 더 많이 겪었을건데 그런 부분을 조금만 더 다루고 어떻게 극복했는지까지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면 체험이 균형을 이루고 감동을 더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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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글 제23편 리광식 <우리 아리랑을 위하여>심사평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우리 아리랑을 위하여” 석양을 불태우는 리광식의 납함(吶喊) 

언어는 민족 문화의 플랫폼이며 그 민족 문화의 구성부분으로, 한 민족의 사고특성과 한 민족의 객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체현한다.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가 소실되면 그 민족도 소실된다.

 

현재 조선민족의 언어는 바야흐로 쇠퇴되고 소실될 위기에 처해있다. 조선어의 소실은 조선민족 문화의 소실을 의미하며, 조선족의 사멸을 의미한다. 이 끔찍한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은 없을까?

 

리광식의 "우리 아리랑을 위하여"는 바로 그런 사고의식과 명제를 우리 사회에 던져주며 “우리 말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과,“그 잃어가는 것을 꼭 지키고자” 하는 사이의 갈등과 애환을 쓰고 있다. 또, 그 갈등의 내면에“언젠가는 잃어버리고 말게 될 우리 말”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막무가내를 담아서“민족언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자”고 납함(吶喊)하고 있다.

 

현실 생활에서 우리 조선족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것"부터 보자. 조선족이란 이름을 갖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개혁개방으로 미국, 일본, 러시아 등 나라로 진출"을 해서 "조선문화를 지키고 조선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 후대들은 어떠할지 근심이 된다." 그래서 작자는 글을 써내려가는 도중 "참 예측하기도 힘들다. 우리 집 아들 딸들, 손자 소녀 모두 중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우리 글도 잘 모르니 근심뿐이지만 뾰족한 좋은 방법도 별로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한민족이 만든 독특한 정형시의 하나인 시조를 좋아하는 작자는 문장의 결말에서 가서도 "위의 시조에 펼쳐진 퉁소 소리, 다듬이 소리 점점 멀어져 가는 현실이 슬그머니 걱정되며 중국의 조선족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진다."고 한탄을 한다.

 

여기서 작자는 조선족 사회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은 "중국 조선족의 미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손자, 손녀"들이 조선말을 못하고 중국 학교를 다녀야 하는 현실이니 조선족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는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다음은 작자가 "지키려는 것"을 보자. 민족언어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현실임에도 로일대 조선족 문화인들은 "조선족의 민족문화를 살리기 위해서 안깐힘을 기울리고 있다.” 그 예로 길림시에서 출간하는 민족 문학잡지 '도라지', '문학사랑', '새 아리랑' 등을 들면서 작자는 본인이 80살의 고령임에도 10년째 편집을 맡고 있다고 쓰고 있다. 특히 문학예술연구회 김태선 총회장의 헌신적인 사실을 예들면서 "우리 글과 민족문화는 대대로 이어져 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장한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그 "굳게 믿고 있다"는 말이 독자들한테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바야흐로 "미래"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마치 짓붉게 타는 석양을 보듯 가슴이 먹먹해 난다.

 

작자는 이 글에서 "잃어가고 있는 것"과 "지키려는 것"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하며, 그래도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즉 "나의 인생은 풍만한 채색 인생이라고 만족하면서 저도 모르게 희죽 웃는다"고 결말을 맺고 있다. 이는 뜻깊은 글의 주제를 포착해서 글을 썼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글의 단점도 있다. 우선“문제해결”의 방도가 너무 제한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 조선족이“미래를 잃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그 대안은? 잡지를 꾸리고 글을 쓰고 김치문화축제 등을 개최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좀더 깊은 사색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요즘 대도시들에서 “한글 주말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런 시도도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이 글의 문체가 분명치 않다. 서두에 '아리랑'에 대한 풀이로부터 '조선족' 명칭에 대한 작자의 논술식 풀이가 전반 글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뒤로는 민족언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로일대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서사의 문체를 빌어 쓰고 있다. 칼럼인지, 실화인지, 수기인지, 수필인지 문체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냥 짬봉이 된 것 같다. 애매한 형식의 문체로 씌어지다보니 글도 조금은 애매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어느 한 문체를 선택해서 글을 써야 그 문체가 나타내는 구성적인 특점과 서사나 묘사의 강한 힘을 나름대로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문체를 사용해 글을 쓸 것인지 고민을 해서 필을 들면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글도 좀더 매끈하게 다듬었으면 한다.

 

끝으로, 80세 고령임에도 민족심을 잃지 않고 “우리의 아리랑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계시는 작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싶다. 조선족 지성인들이라면 리광식의 납함(吶喊)에 모두가 귀를 기울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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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글 제24편 정춘미 <벚꽃 엔딩>심사평

전은주 문학평론가,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

 

이 글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후배를 3년이 지난 뒤에 회고하고 있다.

 

필자는 2019년 자정 무렵, 후배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그 죽음과 연관된 자신의 생각, 후배와의 추억 그리고 이루지 못한 약속에 대해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죽음은 ‘삶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 끝은 누구에게라도 불가역적이며 불현듯 다가온다. 우리의 삶을 작두로 무 썰 듯 단절시킨다. 그렇다. 모든 죽음은 거의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건 착각이다. 죽음은 항상 우리의 삶과 함께 있기 때문에 삶의 한쪽 얼굴은 죽음의 얼굴일 것이다. 이쪽으로 돌리면 삶이지만 저쪽으로 돌리면 죽음이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격언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진정 깨닫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그 얼굴 한쪽인 죽음을 애써 외면한다. 왜 그럴까? 누구도 죽음의 세계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실감하는 순간 이미 삶과 이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그 죽음의 세계는 언제나 두렵다.

 

이 글의 필자는 3년 전에 이 두려움의 세계와 느닷없이 만난 사건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두렵고 황망한 일이지만, 가능하면 담담하고, 평온하게 추억을 섞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데 비록 본인이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 애절한 사건을 말하며 시작부터 딴전(?)을 피운다.

 

이 글의 서두는 엉뚱한 사건으로 장황하게 시작된다.

비록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큰 문제이기는 해도 이 글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것이 이 사건의 초점을 오히려 흐리게 한다. 그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8,900미터의 고공에서 2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동방항공기 추락사고에 대해 500자에 이르는 긴 글(?)로 시작한다. 설마 후배의 죽음이 탑승객 123명과 승무원 9명 전원 사망한 그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가 절대로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 또는 의도와는 달리 서두에 쓴 이 끔찍한 항공기 추락사고 때문에 독자는 그 후배의 죽음에 대한 필자의 애절한 사연을 다소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대형 사고에 견주면 사고로 죽은 후배에 대한 추억이나 그 죽음이 빚어진 필자의 정신적 충격은 범상한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후배의 죽음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 사건은 곧바로 “서른을 맞이하는 자신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그 소식을 들었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머리가 어디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굳어지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그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그 후배와 너무 닮은 한 중년여성과 눈이 마주치고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또 가장 절망적인 눈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배와의 만남도 아련한 추억으로 회상한다.

“그날 우리는 명동거리를 휩쓸며 맛집 탐방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쇼핑도 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눴고, 이듬해 4월쯤 논문심사가 마무리되면 그때 꼭 다시 만나서 ‘벚꽃구경’도 하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어버렸음을 안타까워한다.

 

필자는 입관식에도 참석하고, 한 줌의 재가 되어 모셔진 납골당에도 간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는 이들과 그 납골당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다들 헤어진다.

 

그는 후배가 떠나고 난 뒤, 한동안 길을 가다가 후배와 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휩싸이는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 했다. 이제 시간이 흘러 3년이 지났지만 ‘지금처럼’ 벚꽃이 피면 함께 걷자던 그 약속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다가 벚꽃이 만개한 봄날, TV뉴스에서 3년 만에 여의도 벚꽃길을 개방한다는 방송을 듣고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휩싸인다.

 

필자는,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소원을 남기며 이 글을 끝낸다.

 

“당신이 걷는 길이 항상 꽃길이기를 바라지만 설사 흙길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는다.

이 글의 논평을 쓰며 이런 의문이 생긴다.

글의 서두가 후배의 죽음을 알리는 사건으로 시작해서, 3년이 지난 지금 활짝 핀 벚꽃을 보며 솟구치는 그리움으로 주체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 글의 감동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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