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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와 녀자가 어느 골짜기로 들어섰다. 남자는 배낭을 멨고 녀자는 낫을 들었다. 녀자가 앞에서 걷고 남자가 뒤를 따랐다. 건너온 보뚝에는 돌이며 나무의 틈새로 강물이 세차게 빠져나간다. 늪지로 들어서니 쑥이며 풀이며 잔나무들이 제멋에 흥겨워 자란다. 하얀 갈꽃들이 어떤 깃발처럼 곳곳에서 기분이 좋게 나붓긴다. 녀자가 가끔 휘두르는 낫에 정오의 해빛이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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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가 찾아왔다. 눈길이 약간 불안스러웠다. 불도 켜지 않은 골방에 나는 팔깍지를 끼고 누워있다. 허연 달빛이 방안에 흘러들어 팬티만 입고 뒹구는 자를 허여멀쑥 빚어놓는다. 생각이랑 심보랑도 허여멀겋게 보일것이다. 흑백사이 묘한 구간을 찾아 네발 뻗고 만사태평 그짓만 생각할것이다. 매일 밥만 퍼먹고 궁싯거리기만 한다. 그놈한테는 정신도 사상도 없어보인다.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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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부터 나한테는 하나의 일과가 주어졌다. 불쌍한 친구를 관찰하고 체크하기였다. 새벽 여섯시 날이 희붐히 밝으면 남수는 일어났다. 뒤뜨락에서 밭고랑이나 김을 매지 않으면 이랑을 지었다. 아줌마들처럼 일년감이며 고추이며 가지들의 순도 잡아주고 오이나 줄당콩도 따서 부엌으로 갖고들어갔다. 이일저일 잡히는대로 하며 복선녀네 집의 동정을 살폈다. 아침 여섯시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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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단순하게 변해갔다. 단순해질수밖에, 원래부터 단순하니까. 그러고보면 말을 해도 앞뒤가 어울리지 않을만큼 단순했다. 내게 세상으로 통했던 길은 고향의 작은역,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객차의 파란색깔이 보내는 어떤 메시지와 기적소리였다. 가끔 가까운 현성역에 오가기도 한다. 고향역에서 흔들거리며 걸어내리면 금방 동네에 들어선다. 십자가를 그은 큰길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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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그대와 사랑이 움튼 곳, 동북평원의 이름없는 내 고향 지형도가 상기도 손금보듯 안겨온다. 고향의 기차역은 꽤 높은 둔덕에 자리잡고있다. 객차는 아침저녁으로 한번씩 오갔고 승객은 별로 많지 않다. 평소 이삼십명정도 오르내린다. 홈을 빠지면 코앞에 큰길이 가로질러 갔고 큰길 건너는 꽤 큰 논벌이 마을을 포근히 품고있다. 역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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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요?” 남순애선생이 물었다. 나는 그녀 뒤 창가로 기여드는 땅거미를 보았다. 소실되여가는 빛속에서 그녀는 더더욱 어슴푸레해지고 앞에 앉아있듯없듯 좀전의 뚜렷한 존재감을 상실해갔다. 그녀 어깨에 떨어지는 어둠의 날개는 더더욱 무겁고 침침해보였다. “복선녀라? 호, 그렇게 좋아했슴다? 진수아주버님의 그림에서도 얼굴 한번 본듯 하네요. 이 사진보니까 수더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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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나는 그녀에 관한 단편을 쓴적이 있다. 발표를 꺼려했던 까닭을 지금도 딱히 밝힐수가 없다. 그녀와 나의 사랑, 그 애틋함이 이뤄지지 않았던 원인은 무엇일까? 세월만 탓하기엔 무리했다. 그래서 늘 죄책감에 시달려왔는지 몰랐다. 그대의 이름은 복선녀, 나의 첫사랑. 남자는 녀자를 사랑하기 시작해서부터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인다는 말이 있다. 나는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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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녀의 좌석은 내곁이였다. 티켓을 들고 기웃거리더니 나를 지나 항공기창구쪽에 가 앉았다. 우리는 비로소 웃으며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순간 코끝에서 담담한 향수내가 사물거려왔다. 이슬맺힌 풀잎과 잔잔한 들꽃에서 풍기는것 같은 싱그런 살내까지 묻어있다. 묘한 곡선을 그린 눈확과 코와 입과 알맞춤한 귀가 만지고싶도록 생생하게 안겨와서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문화·문학
이동렬
2009.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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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씨는 나에게 한 녀인의 얼굴을 상기시켜주었다. 때때로 눈앞에 얼른거리며 심심잖게 내속을 태우던 그녀, 간밤에는 꿈속에 나타나 새벽녘까지 심신을 괴롭혔었다.악몽속의 그녀의 얼굴은 괴이한 화상이였다. 입술이 반쪽, 코구멍이 하나, 눈과 이마와 머리가 역시 반이였다. 가운데를 칼로 베듯 한일자로 자르지 않았고 톱날로 알맞춤 켜놓은듯 인중과 이마에 괴상한 무늬
문화·문학
이동렬
2009.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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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로비커피숍에서 나는 웬 미모의 중년부인과 마주앉았다. 내가 미소짓자 그녀가 못본척 슬쩍 외면을 했다. 참말 보지 못했을수도 있다. 우리는 As비행기탑승을 기다리다 잠간 짬을 낸것이였다. 그녀가 곧 레지를 불렀다. “커피, 모카요.” 모카(Yemen Mokha)라? 영어식발음이 조금 생경했다. 커피를 유달리 좋아하는 나는 모카가 커피의 귀부인으로 인정받고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9.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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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자컨대 한 일년후의 이맘쯤이면 나는 아마 거기에 가있을것이다. 천도끼, 당신이 우리의 족속에로 또한번 귀순했던 고장, 소시적 내가 가본 그곳에는 강이 하나 있었다. 폭이 별로 넓지 않으나 그런대로 수량이 꽤 많은 강이다. 백두성산에서 발원하고있는 전설의 강, 우리 족속들에게는 영원한 푸른 두만강으로 불리우고있다. 나는 산등성이에 서있었다. 나의 발밑은 가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9.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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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동상 곁에 앉아 나는 마침내 길을 나서게 되었다. 와이프를 향한 어떤 오기였을까? 아닐 수도 있다. 와이프와 딸애는 공항입구에서 나를 내려놓고 곧바로 택시를 돌려세웠다. 딸애 영어수업시간이 빠듯이 다가왔기에. 해맑게 웃으며 손을 젖는 그녀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인츰 사라져갔다. 그녀들은 나의 식구이고 이 세상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9.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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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동현이는 맥주를 훌쩍거리며 투덜거렸다.동현이는 여전히 북경에서 회사를 차리고있었다. 회사의 규모는 바람이 실실 새고는 있었지만 그런대로 부풀고 있었다. 창호는 소파에 앉은채 웃으며 맥주캔을 쳐들었다.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9.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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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택시는 좁아도 더 좁을수 없는 세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위태위태하게 달리고있었다. 산들의 허리를 자르고 난 도로를 따라 달리는 택시안에서 창호는 아득하게 높이 솟은 산과 침울하게 어두운 계곡에서 번뜩이는 물의 흐름을 바라바보며 말못할 위압감과 불안을 느꼈다. 우중충한 산에는 신록이 짙어있었지만 북방의 수림과 같은 신선함이 없었다. 계절의 선명한 변화가 없는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9.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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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십메터 되는 계단을 내려가자 오강가였다. 물이 세차고 생각보다는 맑았다. 작은 기계배 몇척이 콩크리에 박힌 쇠기둥에 매여달려 강물의 흐름에 따라 흔들거리고있었다. 배우에서 중년은 되여보이는 남자가 그믈에 걸린 무엇을 뜯어내고있었다. 산을 타고 해가 금방 넘어가 하늘은 아직도 맑갛게 밝았으나 오강의 계곡은 침침하게 그늘이 지여있었다. 물안개가 피여오르는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9.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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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티셔츠만 입었는데도 땀이 흘렀다. 어데라 없이 이상한 사투리를 탁탁 쓰는 사람들이 붐벼댔다. 그때에야 창호는 이곳이 북회귀선과 가까운 지방이라는것을 실감했다. 하이란에서 북경을 거치는 다이렉트 항공기로 중경까지 날아와 이곳 부용진까지 들이닥기 전까지 창호에게는 먼길을 떠나왔다는 실감이 없었었다. 그러나 부용진이라 부르는, 중경에서 뻐스로 일곱시간을 달려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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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창호가 삼림렬차에서 내릴 때에는 늦은 오후였다. 려객이라야 창호를 내놓고 토끼털 귀막이를 건 젊은이 한사람이였다. 역사는 여전히 열사람이 들어서면 설자리가 좁을 자그마한 단층집이였다. 다만 전에는 초가였지만 언제 지었는지 지금은 기와를 얹고있었다. 역에는 여전히 플래트홈이 없었다. 역사의 마당에 세멘트로 만든, 따구쟈라고 쓴 간판이 찌부러진채 창호에게 현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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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눈내린 뒤의 화창한 날이였다. 은백색으로 뒤덮인 산야에 깊은 상념이 살아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있는듯 고즈넉함이 깃들고있었다. 따구쟈방향으로 가는 뻐스는 눈때문에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창호는 삼림렬차를 타려고 옛날에는 목재저장소가 있던 청구진의 서쪽 외곽으로 걸어갔다. 다니는 차들과 사람들의 발에 내린 눈들이 다져져 빙판처럼 미끌거렸다. 청구진의 중심가라지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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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것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창호는 레이훙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레이훙을 식당으로 보낼수도 없었고 호텔로 보내기는 레이훙이 입은 옷이 너 야했다. 집으로 가겠는가고 물었을 때 레이훙은 울던 사람 같지 않게 말갛게 웃었다. 샤워를 한 레이훙이 욕실에서 나왔다. 화장이 지워진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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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필리핀남자가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쉬는듯한 바스음성으로 부르는 노래에는 애절한 그리움과 얇은 숙명이 깔려있었다. 노래는 영어로 부르고있었기에 창호의 수준으로는 가사를 파악하는데 껄끄러움이 있었다. 인순이가 가사의 토막토막을 번역해주었다.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8.12.06 00:00